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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조앤 Jun 27. 2021

아들 셋 엄마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데

   우와, 정말이요?

내가 아들 셋이라 말하면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은 이랬다. 셋이라고요? 숫자를 분명히 말했는데 웬일인지 꼭 다시 물었다. 하지만 그다음 말이 사실 나는 더 의아했다. 

대단하시네요.

대단하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나는 대단하다는 말을 언제 누구에게 붙여주었지? 휙, 되돌아본다. 기대하지 않은 것에 높은 평가가 나왔을 때다. 그러면 그것은 큰 칭찬이 맞는데 나는 이 말을 들을 때마다 한 번도 칭찬스럽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대단하다는 말 저 뒤편에 걸쩍지근한 것이 어릿어릿 보였고 느껴졌다.

내가 첫아들을 낳았을 때

엄마는 말씀하셨다. "수고했어. 네 할 일은 했구나."  내 '할 일'이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 결혼식 올리기 열흘 전까지 나의 할 일은 돈 버는 일이었다. 나는 그 일에 충실했다고 생각한다. 그전에 내 할 일은 학생이었으니 공부였다. 그 일을 열심히 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때로 어렵고 지루했으니까. 그러나 난 성실은 하였다. 학교와 직장에서 개근상과 장기근속상을 받은 걸 보면.

결혼은 내 의지로 한다

는 '분명함'이 나에게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사랑과 결혼은 다르다는 걸 엄마에게 배운 건 아니었다. 나는 <동사> 단어에서 그 차이를 <발견>했다. 왜 사랑에 빠진다고 하는지, 결혼은 하다인데. 궁금했다.

사랑을 하다 / 사랑에 빠지다

사랑은 둘 다 쓰기 가능한 문장이다.

결혼을 하다 / 결혼에 빠지다

결혼에는 빠질 수 없었다.


그런 거구나. 결혼에는 의지, 내 결단의 크기가 더 많이 작동하는구나. 사랑은 사랑을 하겠다는 의지도 중요하고, 결의를 할 수도 있겠지만 사랑에 빠지는 불가사의가 내재되어 있는 거구나. 나의 의지로 제어할 수 없는 힘이 그 안에 있구나 하며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윤곽을 더듬거렸다. 두 동사의 차이대로 나는 사랑에 빠졌고 외부의 간섭과 종용 없이 오롯이 내 의지로 결혼을 결정했다.

엄마는 나에게 덧붙이셨다.

첫아들에 첫 손주이니 좋아하시겠어

하나면 되었다. 거기다 아들이니 하나로 끝내. 남들 하는 대로 하나는 키워봐야지 뭐. 나는 물었다. '엄마는 셋이면서...' 그러자, 네가 힘드니까 그렇다는 거야 하셨다.

엄마는 육 형제의 첫 딸이고, 아빠는 칠 형제의 막내이시다. 나는 위로 오빠와 아래로 여동생이 있다. 그런데 나는 늘 내가 첫째라고 대답했다. 위로 오빠는 셈에서 늘 뺐다. 둘째는 이러이러하다는 특성이 나는 없다. 첫째로 컸으니까. 위에 언니가 있었다면 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엄마는 할아버지 40세에 첫 딸이어서 그 시절 대장 노릇하며 크셨다. 다행히 나는 그 엄마의 첫 딸이라 오빠가 있었지만 여자라는 단서를 많이 붙이시지는 않으셨던 것 같다.

내가 결혼할 사람이 생겼다며 '그'를 소개할 때 엄마의 첫 반응은  첫째 아들, 그게 좀 걸리기는 하는데 하시다가 요즈음은 다들 하나 둘만 낳으니 잴 수가 없지 하셨다. 엄마가 좀 걸려 하셨던

그는 종갓집 장손이었다

나는 종갓집 맏며느리 자리를 그 당시에 으악,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나는 <종갓집 맏며느리>가 무얼 가리키고 있는지 몰랐다.


엄마는 나를 포대기에 싸서 업고, 아장아장 걷는 오빠 손을 잡고 서울로 입성하셨다고 했다. 친할머니는 아빠 나이 열 살에 돌아가셨다. 엄마는 시어머니 얼굴도 모르는 막내며느리요 아빠는 형제들 중 유일하게 서울로 올라오셨다.

엄마는 경험하지 않은 시댁과 종갓집 맏며느리의 역할을 모르신다

그런 엄마가 키운 딸에게 종갓집 첫째 아들에 대한 멘트를 길게 하실 수 없었던 것이었다.

결혼은 두 집안의 만남이 얽히고설키는 과정인데 그 과정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나와 그는 태평양 바다를 건넜다. 아들딸 시댁 처갓집 며느리 사위 구분이 없는 먼 곳 미국에서 아이들은 태어났다.


내가 셋째 아들을 낳았을 때

비로소 난 한국의 상황이 좀 바뀐 것을 눈치챘다. 엄마의 '손주 칭찬'은 첫째에서 끝났다. 밖에서도 아들 셋이라 말하면 다들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다시 쳐다보기 시작했다. 엄마는 셋째가 딸이었으면 좋았을 걸 하시더니, 야, 아들 셋 키운 엄마의 똥은 개도 안 먹어하셨다. 나는 그런 관용구가 있는 줄 처음 알았다. 나는 백 점 짜리 엄마에서 마이너스 삼백 점 짜리 엄마로 전락했다.


어떤 날 이웃 남자분이 "야구 방망이가 필요하세요?"

라고 했다. 나는 너무 반가운 마음에 감사하다고 했다. 마침 아이들이 농구다, 야구다 저들끼리 마당이며 마루에서 놀던 때였다. 주시면 받을게요. 집에 하나밖에 없어서 아이들이 좋아할 거예요. 이웃분은 입꼬리를 올리며 아니, 아들 셋이라고 해서 드려본 말이었는데... 했다. 네? 무슨 말씀인지... 남자아이 셋이면 매가 일상 아니겠냐는 뜻이었다. 내 참, 그런... 그렇다면 전 필요 없어요,라고 나는 대꾸해버렸다.

진짜다.
아들 셋을 키우며 나는 저들의 바깥 반응이 이상했다. 내게 딸이 없으니 아들과 딸의 구분과 차이를 세세하게 말할 수는 없겠지만 구분과 차이를 내가 하지 않으면 아들딸이 아니라 아이들로 자란다고 나는 말해주고 싶다.

성(性) 향의 차이가 왜 없겠는가. 생각보다 크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셋째는 수영을 배우다 나처럼 쉽게 포기했고, 집에서 키는 제일 큰데 워터파크에서 놀이기구 타는 걸 꺼려했다. 첫째는 농구에 목숨을 걸지만 농구 게임은 못하고 둘째는 예민하게 군다 했더니 음악을 좋아했다. 지금은 춤까지.

남자 넷이라 하나 집에 들어온 작은 벌레 잡을 사람은 매번 내 몫으로 돌아왔다. 서로 누가 잡을지 의논하는 꼴이 보기 싫으니. 아이들 셋은 놀이터에 나가 다쳐서 들어온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높이 올라가 보라고 소리친 건 나였다. 살짝 높아진 내 목소리에 "엄마, 화났어? 나한테 화내는 거야?"라는 연약스러움에 나는 제재당하기 일쑤였고, "목소리, 커졌다."라고 나의 생기발랄함은 남편에게 저격당했다. 난 이 속에서 나를 알아갔다. 남자들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나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내가 익히 들어온 뭐 뭐 카더라 통신은 부정확했고 사실 쓸데도 없었다.


이 남자들 속에서 나'를 구별해 주는 방법은 있었다. 큰 애는 "엄마, 원피스 입었네. 예뻐요.", 둘째는 저녁을 준비하는 부엌에 기타를 메고 종종 슬며시 들어와 'Love me tender'와 같은 노래를 연주해 주었고, 막내는 나를 없는 동생 쳐다보듯 하며 자주 안아주었다. 한 가지, 머리를 좀 짧게 자른 날에는 이구동성으로 긴 머리가 더 나아요했다. 남자 애들에게 이는 해볼 수 없는 로망인가 싶었다. 긴 머리를 묶을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어서 좋았는데 요사이 막내는 머리통 위쪽으로만 머리를 길더니 나처럼 묶고 다닌다.


내가 구별 짓지 않으면 아이들은 늦은 것도 빠른 것도 잘하는 것도 못하는 것도 다. 여자 남자의 구분과 역할도 그렇지 않을까. 내가 구별 짓지 않으면 아이들은 한 사람으로 예쁘고 건강하게 씩씩하게 자랄 수 있는 것이었다. 


요즘 개들은 무얼 먹는지 키우지 않는 나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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