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이 메뉴명은 이름과는 달리 영국이 아닌 캐나다에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런던 포그는 블랙 티, 홍차에 우유를 섞은 차의 한 종류다.
나는 홍차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는데 우선 홍차를 기본으로 하는 밀크티 종류는 우유 때문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우유 성분 락토스에 때때로 민감했기 때문이었다. 밀크티처럼 차에 변화를 주는 것을 베리에이션 variation이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먹는 커피 중 카페 모카나 바닐라 라테 등도커피 베리에이션에 속한다.
Twinings of London : 처음으로 얼그레이를 출시한 영국의 차 회사
런던포그가 나의 눈길을 사로잡은 점은 홍차에 오렌지향을 가미한 가향차를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당연히 상상이 안되었다. 집에서 호기심과 함께 얼 그레이 티를 (3팩/240ml) 우려 보았다. 오렌지 향을 약하게 구별할 수 있었다. 얼그레이 차의 성분 표시를 보면 베르가못 필이라는 것이 있다.
베르가못이라고 부르는 이 오렌지 과의 과일은 비터 오렌지와 레몬 나무를 접목한 것으로 이탈리아 베르가못에서 생산되는 과일이었다. 먹지는 못하고 이렇게 향을 내는 목적으로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향은 베르가못 껍질의 오일에서 채취하는데 화장품과 비누에도 사용한다는 것이다.
향이 가미되었으니 호불호가 생길 수밖에 없다. 홍차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던 때라 우려진 차 tea를 먼저 맛보고, 그다음에 설탕을 넣어 마셔보았다. 나는 첫맛으로 좋은 것을 알기는 어려웠다. 나의 미각은 그리 예민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우유를 넣어서 다시 맛보았다. 아하, 나에게는 여기서부터가 달라지는 지점이었다. 홍차의 떫은맛을 부드러운 우유와 설탕의 달콤함이 잡아주니 베르가못의 향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런던 포그는 이 얼그레이 티가 베이스 base였다. 여기에 커피 라테를 만들 때처럼 우유를 포밍 해서 우려낸 차에 부어주는 것으로 완성된다. 바닐라 시럽을 추가해도 되는데 대신 나는 여기에 브라운 슈거를 진하게 넣는 걸 좋아한다. 포인트는 하얀 설탕 대신 흑설탕을 넣는 것이다. 차를 마시면서 코로 날숨을 천천히 내쉬면 차의 향을 좀 더 음미해볼 수가 있다. 강하지 않은 오렌지 향이 우유로 부드러워진 홍차 고유의 향을 뒤따라 왔다. 짙은 홍차의 색은 우유와 섞여 옅은 오렌지 빛깔을 띠었다.
새로움이었다. 홍차를 알았던 사람이 아니었으니 오렌지에 홍차가 끼어든 맛과 같았다. 홍차에 오렌지향을 가미했다고 했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갑자기 내가 중요한 비밀 하나를 풀어낸 것 같이 우쭐해졌다. 이런 향과 이런 맛이 있었구나. 나는 어디 가서 얼 그레이 티를 아는 척하며 유식을 드러내고 싶어 졌다. 호불호가 분명할 이 얼그레이 차를 한 번에 맛보고 좋아졌으니. 물론 나의 취향대로 만든 런던포그다. 오렌지 향이 오래 입가에 머물렀다. 이제 홍차는 얼그레이 티와 함께 읽어보고 싶은 한 권의 책이 되었다.
내가 일하는 회사 카페에는 공식적으로 런던 포그 메뉴가 없다. 내가 커스텀 오더로 만드는 메뉴 중 하나이다. 시작은 이랬다. 커피를 좋아하는 손님 중에 중국 직원이 있었다. 그녀는 한 날 내게 단호박 죽 끓이는 방법을 알려달고 했다. 한국 친구가 맛이 좋다고 했다며. 그때 그녀에게 단호박 레시피를 손 카드로 만들어 주었던 것을 계기로 우리는 친해졌다. 어느 날 그녀가 임신으로 커피 말고 다른 음료를 찾는다고 했다. 나는 선뜻 권할 메뉴가 떠오르지 않다가 런던 포그를 말해주었다. 홍차에 우유 라면 요즘 많이 먹는 밀크티에 가장 근접한 메뉴라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이 환해지며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한 명의 비밀 고객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 이후에 한 명 더.
입으로 들어가는 모든 음식에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온도일 것이다. 특히 차는 온도에 따라 맛의 차이가 확연하다. 커피만큼 많은 변화를 주지 않는 기본 차 tea들은 우선 물의 온도가 낮아지면 쓴맛이 더 커지기 때문에 차를 대하는 기본은 찻물의 온도를 맞추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홍차는 녹차와 달리 끓는 물을 부어 우린다.
*런던 포그 earl grey black tea에 우유를 넣어 마시는 차의 한 종류.
LONDON FOG는 불리는 이름만으로도 꽤 인상적이다. 거기에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은은한 오렌지향까지. 팔팔 끓는 물을 붓고 서서히 우러나는 홍차의 물색은 검붉다고 해야 할 것이다. 홍차의 그 짙은 색을 런던의 우울함이라고 생각해보자. 그 런던에 비가 내리는 오후 더 탁해진 도시의 칙칙함을 떠올려보라. 그 위에 가볍게 포밍 된 우유를 따라 붓는다. 우유는 어느새 그 우울함을 부드럽게 덮어주는 안개가 되는 것이다. 뿌옇게 낮게 지면 위를 번져나가는 안개. 이른 새벽 차가운 땅에서 햇빛을 받아 막 피워 오르는 자욱한 안개가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