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작년 4월 친구가 내가 사는 곳으로 일주일 휴가를 내어 찾아왔다. 20년 만의 일이었다. 딱 일주일. 친구와 함께할 시간을 생각하니 나도 물오른 4월의 봄 나무처럼 상큼해졌다. 먼 곳에 가지 않을 것과 내가 만든 음식을 먹이는 것 두 가지만 정했다. 친구는 언제나 빠듯한 직장 생활로 바빴다. 출장은 왜 그리 많으지.
나는 첫날밤은 호텔에서 보내자고 했다. 다음날 아침 늦게까지 푹 잠자기 위해서였다. 집은 아이들 학교 준비로 어수선할 테니 도착하는 날엔 시차 적응도 해야 한다는 이유로 남편에게 아이들 등교를 맡겼다. 나는 외박에 더 신이 났는지 모른다. 사실 아이들과 나는 정말 껌딱지 모양 떨어져 있어 본 적이 없었다. 남편은 결혼 전에 이미 미국으로 발령을 받은 터라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우리는 미국으로 건너왔다. 친구도 가족 친지들도 아무도 없는 헛헛한 땅에서 나의 결혼 생활은 시작되었다.
세월을 말할 만큼 긴 시간이 친구와 나 사이를 흘렀다. 반가웠다. 너무나 소중한 시간을 앞에 두고 우리는 밀린 이야기로 어쩔 줄 몰랐다.
저녁을 먹고 호텔로 들어온 나는 말했다. 꽁꽁 숨겨온 비밀을 풀어놓듯 말했다.
"오늘 너랑 같이 읽고 싶은 <시집>이 한 권 있어. 좀 특별한 시집인데 내가 읽어줄게. 들어볼래?"
"그래, 정말 오랜만이다. 기대된다."
" 너 TV 만화 생각나니? 기억나? 만화 <마징가제트>. 시집 제목이 <마징가 계보학>이야. 흥미롭지 않니? 작가의 배경을 알고 읽으면 시를 좀 더 이해하기 쉽겠지? 작가는 말이야, 충주 사람인데 67년생이래. 오랫동안 달동네에서 살았데. 서울 성북구 삼선동이 달동네인지 난 몰랐어. 내가 서울에서 오래 살았지만 서울은 언제나 낯설어. 시인은 여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재개발되었다고 하네. 80년대 후반 고등학교, 대학 다녔으니 우리와 비슷한 셈이야. 우리가 4050인지 5060인지 모르겠지만 독재와 민주화를 겪고 통과해낸 세대에 속하는 거야. 근데 사실 우리가 그 끄트머리에라도 속하기는 하는지 모르겠어. 너, 데모해본 적 있어? 난 중고등학교 때 독서회 선배들이 데모하고 돌아와 선배들끼리 모여서 머리 맞대고 얘기하는 것을 본 적이 있긴 해. 너도 나와 같다고? 그렇구나. 시인의 이름은 권<혁웅>. 이름 멋있지! 혁명과 영웅을 합친 거 아닐까? 자신을 혁명했다면 진짜 영웅이 맞겠지! 이런 남자 본 적 있어? 내가 어디서 들었는데 역사적인 혁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혁명을 일으킨 장본인들이 자기 자신의 혁명에는 실패했기 때문이래. 내 생각인데 말이야. 이 시인은 혁명에 성공한 것 같아. 이 시집이 그 증거 아닐까? 엄청 멋진 사람이지! 에고, 서론이 너무 길었다. 내가 읽을 테니 들어봐. 읽다가 걸리면 말해. 멈추면 되니까. 걸린 그 자리, 그곳에서 다시 시작하면 되니까."
마징가 계보학
권혁웅
1. 마징가 Z
기운 센 천하장사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밤만 되면 갈
지자로 걸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고철을 수집하는
사람이었지만 고철보다는 진로를 더 많이 모았다 아내가
밤마다 우리 집에 도망을 왔는데, 새벽이 되면 계란 프라
이를 만들어 돌아가곤 했다 그는 무쇠로 만든 사람, 지칠
줄 모르고 그릇과 프라이팬과 화장품을 창문으로 던졌다
계란 한 판이 금세 없어졌다
2. 그레이트 마징가
어느 날 천하장사가 흠씬 얻어맞았다 아내와 가재를 번
갈아 두들겨 패는 소란을 참다못해 옆집 남자가 나섰던
것이다 오방떡을 만들어 파는 사내였는데, 오방떡 만드
는 무쇠 틀로 천하장사의 얼굴에 타원형 무늬를 여럿 새
겨 넣었다고 한다 오방떡 기계로 계란빵도 만든다 그가
옆집의 계란 사용법을 유감스러워했음에 틀림이 없다
3. 짱가
위대한 그 이름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그가 오후에 나
가서 한밤에 돌아오는 동안, 그의 아내는 한밤에 나가서
오후에 돌아오더니 마침내 집을 나와 먼 산을 넘어 날아
갔다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겼다 그 일이 사내
의 집에서가 아니라 먼 산 너머에서 생겼다는 게 문제였
다 사내는 오방떡 장사를 때려치우고, 엄청난 기운으로,
여자를 찾아다녔다 계란으로 먼 산 치기였다
4. 그랜다이저
여자는 날아서 어디로 갔을까? 내가 아는 4대 명산은
낙산, 성북산, 개운산 그리고 미아리 고개, 그 너머가 외
계였다 수많은 버스가 UFO 군단처럼 고개를 넘어왔다
고개를 넘어갔다 사내에게 역마(驛馬)가 있었다면 여자에
게는 도화(桃花)가 있었다 말 타고 찾아간 계곡, 복숭아꽃
시냇물에 떠내려오니.....그들이 거기서 세월과 계란을
잊은 채...... 초록빛 자연과 푸른 하늘과...... 내내 행복
하기를 바란다
나는 그날 미국 달라스 호텔방에서 한국 시집을 소리 내어 읽었다. 상상이 되는가? 나도 상상해본 일이 아니었다. 배꼽 빠지게 웃으며 읽은 시집은 처음이었다. 분명 웃었는데 눈물이 났다. 웃음의 눈물이었는지 애잔함의 눈물이었는지. 나는 친구와 같이 시를 읽던 그 밤이 꿈같다. 다시 못 올 순간임을 그리 절절히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날 친구와 나의 추억은 이 시집 속에 고스란히 숨어들었다. 오롯이 새겨졌다. 친구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그 시집을 펼칠 때마다 그때의 웃음들이 새어 나왔고 그때의 눈물들이 방울방울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