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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조앤 Mar 16. 2021

오늘 나는/심보선

시인의 여자 되기

오늘 나는


                          심보선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오늘 나는 이미 사라진 것들 뒤에 숨어 있다

태양이 오전의 다감함을 잃고

노을의 적자색 위엄 속에서 눈을 부릅뜬다

달이 저녁의 지위를 머리에 눌러쓰면 어느

행인의 애절한 표정으로부터 밤이 곧 시작될 것이다

내가 무관심했던 새들의 검은 주검

이마에 하나 둘 그어지는 잿빛 선분들

이웃의 늦은 망치질 소리

그 밖의 이런저런 것들

규칙과 감정 모두에 절박한 나

지난 시절을 잊었고

죽은 친구들을 잊었고

작년에 어떤 번민에 젖었는지 잊었다

오늘 나는 달력 위에 미래라는 구멍을 낸다

다음 주의 욕망

다음 달의 무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

.

.



한 여자


                                      조앤




시란 게 대개는

말 수 적은 사내가 툭 던진 한마디 말과 같아

받아 들고는 매번 어쩔 줄 몰라하곤 했다


주사위를 던지듯

이리 굴리고 저리 굴려보지만

가리키는 숫자를 도통 알 수 없어 투덜대곤 했다


기껏해야 숫자란

내게 여덟 자 생년월일과 행운의 칠 자뿐

그것으로 사내의 비밀 뚜껑을 열기는 어려워

그 비밀을 왼쪽 가슴에 별 훈장으로 붙이곤

그의 여자로 낙인 되기를 자주 꿈꾸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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