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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조앤 Mar 16. 2021

아욱국/김선우

시로 국 끓이기


아욱국

                      

                                      김선우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처럼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엄마, 오르가슴 느껴본 적 있어?

-오, 가슴이 뭐냐?

아욱을 빨다가 내 가슴이 활짝 벌어진다

언제부터 아욱을 씨 뿌려 길러 먹기 시작했는지 알 수 없지만

-으응, 그거! 그, 오, 가슴!

자글자글한 늙은 여자 아욱 꽃빛 스민 연분홍으로 웃으시고

나는 아욱을 빠네

시 푸르게 넓적한 풀밭 같은 풀잎을

생으로 나 그저 데쳐 먹는 게 아니라

이남박에 퍽퍽 치대어 빨아

국 끓여 먹을 줄 안 최초의 손을 생각하네

그 손이 짚어준 저녁의 이마에

가난과 슬픔의 신열이 있었다면

그보다 더 멀리 간 뻘밭까지를 들쳐 업고

저벅저벅 걸어가는 푸르른 관능의 힘,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

치대지는 아욱 풀잎 온몸으로 푸른 거품

끓이는 걸 바라보네

치댈수록 깊어지는

이글거리는 풀잎의 뼈

오르가슴의 힘으로 한 상 그득한 풀밭을 차리고

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

어린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먹이는

아욱국 끓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아욱국」을 이 시에 나오는 대로  끓여보기로 작정했다.


    한국 음식 제일 안 먹는 막내는 시금치 된장국은 좋아한다. 아욱국이 비슷하니 잘 먹으리라 기대하며 일 끝나자마자 한인 마트에 들렀다. 신선한 아욱이 마침 있었다. 두 단을 고르며 내 마음도 아욱처럼 파래졌다. 내가 딱 한 번 아욱국을 끓여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나는 시금치와 구별하지 않았다. 시금치 대신 아욱을 넣었을 뿐이었다. 나는 겨우 시금치와 아욱을 식별했던 것이다. 조리를 다르게 한다는 것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 시를 읽고서야 나는 알았다. 아욱국을 끓이는 방법이 특별하다는 것을. 내가 무언가를 놓쳤는데 그것은  아욱을 치대는 것이었음을.


아욱을 치대어 빨다가 문득 내가 묻는다

몸속에 이처럼 챙챙한 거품의 씨앗을 가진

시푸른 아욱의 육즙 때문에


    제일 낯선 것은 연한 푸른 잎을 치댄다는 것. 내 손에서 짓이겨질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돌로 소꿉장난하듯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이남박- 홈이 파인 넓적한 그릇에 손으로 힘껏 뭉개라는 말은 사실 너무 이상하게 들렸다. 먹어본 기억은 있는데 엄마가 만드는 것을 본 기억이 나지 않았다. 의심 나고 의아하여 결국 유튜브로도 확인했는데 손으로 치대라는 건 분명했다. 시키는 대로 해야 한다. 별수 없다. 처음 하는 일에 토를 달 수는  없는 일. 그건 해본 후에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아욱을 빠네

시푸르게 넓적한 풀밭 같은 풀잎을

생으로 나 그저 데쳐 먹는 게 아니라

이남박에 퍽퍽 치대어 빨아

국 끓여 먹을 줄 안 최초의 손을 생각하네


   가슴 가득 풍선처럼 부푼 의아심을 누르고 푸른 풀, 아욱 두 단을 손질한 후  이남박에 넣어 손으로 힘껏 으깼다. 손바닥을 그릇 바닥에 닿도록 아욱을 어깨에서 내려오는 힘으로 퍽퍽 치대어 짓이겼다. 약한 것을 누르는 느낌이 좋지는 않았다. 토를 달기 위해 토를 달지 않고 해 본 첫 일이었다.


   아욱 줄기 안에서 미끈한 점액-육즙이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래서  치대어도 되는 거였다. 치대어도 뻑뻑해지지 않았다.  쉽게 뭉개지지  않았다. 뭉개져서 형체가 없어질 염려를 내려놓았다. 모르는 생명체를 만지는 느낌이 이와 같을까.


사랑이 아니라면 오늘이 어떻게 목숨의 벽을 넘겠나

치대지는 아욱 풀잎 온몸으로 푸른 거품

끓이는 걸 바라보네

치댈수록 깊어지는

이글거리는 풀잎의 뼈


   아욱 줄기  안에 끈끈함이 적은 물과 섞이며 치댈수록 걸쭉한  푸른거품을 만들어냈다.  손가락에 엉겨 드는 끈끈함이 미끄덩미끄덩거릴 때, 사는 일이 이런 가, 나는 지금 어딘가에 뿌리를 내려 엉겨있는가, 왜 이리 미끄덩거리며 안으로 깊게 스며들지 못하고 겉도는가. 푸른 풀냄새가 코를 자극하자 내 마음이 일렁이었다. 푸른 풀밭이 되었다.


   멸치 국물을 진하게 우려내고, 된장을 좀 적게 풀고는 마늘 넣고, 으깨진 아욱을 흐르는 물에 씻은 후 마지막으로 넣었다. 바글바글  끓였다.  당연히 오래 끓일 필요가 없었다. 풀이 아닌가. 숨 죽으면 먹을 수 있는. 그냥 날것으로도 먹을 수 있는 약한 것.  그것을 나는 힘을 써가며 뭉개고 으깨어 그 몸을 끓는 연한 된장국에 풍덩풍덩 넣었던 것이다.


   시금치와 다른 풀 향이 정말 은근하게 배어 나왔다. 봄의 냄새, 푸릇한 냄새가 된장국과 잘 어울렸다. 아하, 이 맛이구나. 엄마가 끓였던 맛과 같아지니 안심이 되었다. 아욱을 치댈 때, 조마조마했다. 레시피를 읽었고, 유튜브 동영상으로 확인했음에도. 첫 음식.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해보는 일이라는 것. 내 손으로 직접 한다는 일은 이런 것이었다. 불안불안. 망칠 수 있다는 가정. 그래도 되는 일인데 그 순간만큼은 조바심 쳐지는 일. 엄마와 같은 맛을 확인하자 안도하는 내 모습. 나는 엄마에게 배우지 않은 아욱국을 내 손으로 끓여내었다. 엄마는 내가 만든 음식을 맛보시지 못하고 전화로 전해 들으셨다. 나는 마침내 시금치 된장국과 아욱국의 다른 맛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마트에는 봄 달래도 이르게 나와있었다.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니 아욱과 함께 한 단을 같이 샀다. 그것으로 달래 간장을 만들고, 콩나물은 물에 데쳤다.  아욱 된장국, 달래 간장, 콩나물과 밥, 그리고 총각김치가 곁들여진 소박한 저녁 밥상이 완성되었다.


슬픔이 커서 등이 넓어진 내 연인과

어린것들 불러 모아 살진 살점 떠먹이는

아욱국 끓는 저녁이네 오, 가슴 환한. 


    한국 음식은 정말 손이  많이 간다. 어떤 나라와 비교가 안된다는 것을 나는 이제 훤히 안다. 엄마의 수고가 너무 많이 들어가는 음식이라는 걸 분명하게 알았다. 나는 이리 만든다 큰 소리로 떠들지만 만들기와 사 먹는 일이 반반이며,  반조리 음식도 많이 사용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엄마에게 많은 수고를 짐 지웠음을 깨달았다. 나는 자라면서 음식을 거의 안 했다. 큰 딸이었는데, 학교 졸업하고 직장 다닐 때 나는 아빠와 똑같았다. 엄마가 아침에 깨워주시고 아침밥 만들어 놓은 신 것 겨우 먹어주고 출근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미국으로 왔다. 이런 나에게 엄마는 멀리 있어서 마음에 늘 걸린다 하셨다. 나는 그런 내리사랑을 못한다, 지금. 나는 받기만 하고 주는 것 적은 사람이다.

아욱국 끓인 저녁 / 그림.조앤


소박한 밥상이 차려졌다.

시로 끓여낸 아욱국이 봄 내음을 전하는

담백한 푸른 밥상이 준비되었다.


둥그렇게 둘러앉아

이른 봄을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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