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유능한 정원사 파이퍼가 오후에 회사 정원 관리를 위해 오랜만에 얼굴을 나타냈다. 우리는 지난 한파를 어찌 보냈는지 서로 묻고 대답했다. 파이퍼는 전기는 문제가 없었는데 4일 동안 물 공급이 잘 안되어 큰 통에 물을 받아서 화장실 물로 써야 했다고 전했다. 우리는 빙하기에 살아남은 생존자가 되어 그만하기 다행이라며 반갑게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한파:지난 2월 중순 텍사스 100년 만의 폭설과 추위)
한파를 견딘 아루 굴라 @회사 정원
회사 정원의 대부분의 허브들은 이번 한파를 견디지 못했다. 그녀는 파종할 것들과 모종 할 것들을 잔뜩 싣고 나타난 것이었다. 그녀는 금빛 머릿결 봄이 되어 환하게 찾아온 것이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보자마자 <청춘/심보선>의 시를 떠올렸다.
청춘
심보선
거울 속 제 얼굴에 위악의 침을 뱉고서 크게 웃었을 때자랑처럼 산발을 하고 그녀를 앞 질러 뛰어갔을 때분노에 북받쳐 아버지 멱살을 잡았다가 공포에 떨며 바로 놓았을 때강 건너 모르는 사람들 뚫어지게 노려보며 숱한 결심들을 남발했을 때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을 즐겨 제발 욕해달라고 친구에게 빌었을때가장 자신 있는 정신의 일부를 떼어내어 완벽 한 몸을 빚으려 했을 때매일 밤 치욕을 우유처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잠들면 꿈의 키가 쑥쑥 자랐을 때그림자가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가로등과 가로등 사이에서 그 그림자들 거느리고 일생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을 때사랑한다는 것과 완전히 무너진다는 것이 같은 말이었을때솔직히 말하자면 아프지 않고 멀쩡한 생을 남몰래 흠모했을 때 그러니까 말하자면 너무너무 살고 싶어서 그냥 콱 죽어버리고 싶었을 때 그때 꽃 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뿐이라는청춘이라는
봄과 청春이 같은 말이 되었을 때. 씨 뿌리는 파이퍼의 <청春>의 손을 덥석 잡고야 말았다.
파이퍼는 씨앗을 한 손안에 꼭 쥐고는 흙 고랑을 작게 만들었다. 작고 여문 레디시 씨앗을 길쭉하게 길
것 같은 고랑 속에 2-3개씩 콕콕 집어내어 흙 속에 심었다.
그러나 아루굴라 씨앗은 너무 작고 가벼웠다. 다른 한 손 다섯 손가락으로 흙을 힘껏 흔들어 기지개를 켜주고는 흙 위에 눈처럼 흩뿌렸다.
짙은 거름과 섞인 흙은 까만 밤하늘 같았다. 그 밤하늘에 그녀는 <청春>의 손으로 별들을 정성스레 심는 걸 나는 내내 지켜보았다. 빛나는 햇볕 아래 분주한 그녀의 손을 오래오래 쳐다보았다.
봄과 청春은 같은 말이었다. 봄과 청春은 다른 겉모양, 형태일 뿐이었음을 알았다. 북극에서 내려온 칼같이 매섭고 잔인했던 한파가 지나간 그 자리에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씨를 뿌리는 자세와 마음을 봄은 그녀의 손으로 보여 주었다. 내년에도 환하게 추위를 헤치고 봄은 올 것이라고 했다. 나는, 나의 청춘은 어떠한지를 물었다. 내년에도 나의 청춘은 봄과 같이 또 온다고 했다. 내가 봄을 기다리며 씨를 뿌리는 그 마음과 그 자세라면.
그때만 꽃 피는
푸르른 봄이라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이라는
청춘이라는
... 청춘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매해 봄처럼 맞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다가올 봄을 준비하는 <청春>의 손을 파이퍼처럼 펼 수 있다면 청춘은 단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