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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조앤 Mar 18. 2021

신발과 시지프스 the mythology

신발론(論)

 

                             마경덕

 


2002년 8월 10일

묵은 신발을 한 무더기 내다 버렸다


일기를 쓰다 문득, 내가 신발을 버린 것이 아니라 신발이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한다 학교와 병원으로 은행과 시장으로, 화장실로, 신발은 맘먹은 대로 나를 끌고 다녔다 어디 한 번이라도 막막한 세상을 맨발로 건넌 적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를 싣고 파도를 넘어온 한 척의 배, 과적過積으로 선체가 기울어버린. 선주船主인 나는 짐이었으므로,


일기장에 다시 쓴다


짐을 부려놓고 먼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

.

.


<막내의 신발론 그리고 청소>

이 아이는 어찌 이렇게 신발을 벗어놓았던가.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니 현관 쪽으로 들락날락한다. 차 거라지(garage)는 집의 뒤편이라 나는 의외로 주 중에는 현관으로 드나들지 않는다. 사진을 잘라서 그렇지 위쪽에 한 켤레의 신발이 더 있었다.

   

   위 사진으로  최소 세 가지의 추론을 해볼 수 있겠다. 첫째 막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깔끔하거나 괴팍하거나. 둘째 막내는 패션 감각이 있다. 옷에 맞는 신발을 매일 고른 것으로 보면. 셋째 신발정리를 안 한 지 일주일은 넘은 것 같다.


  나는 사실 막내의 신발은 그럭저럭 봐줄 수 있다. 그 아이의 <신발론>으로 읽어줄 수 있다. 시인의 신발론(論)대로 신발들이 짐을 부려놓듯 선주인 그 아이 발을 벗어 놓고 먼바다로 배들이 떠나갔다. 현관 허연 바다 위를 지금 짝 맞추어 떠도는 거라고. 그러니 나는 <시>를 찍은 것이다. 그 아이의 신발을 찍은 게 아니렷다. 나는 시를 먹기도 하고 찍기도 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나는 이리  떠들며 거들먹거리기도 하는 속물이다.


   그러나 이 아이, 나의 막내가 방을 안 치우는 것은 나의 오랜 <화두>가 되었다. 별게 다 화두 거리다 싶지만 진짜다. 화두가 별건가, 내가 오래 붙들고 있지만 여전히 오리무중 알 듯 모를듯한 것이니.

   

   난 잔소리 안 하는 엄마라는 이름표를 아이들에게서 얻었다. 내 속은 잔소리가 안 통하니 포기한 것인데 아이들 쪽에서는 마냥 좋은갑다. 그러나 막내는 틀렸다. 두드러졌다. 형들은 가끔씩 내 얘기에 귀를 기울여 주었는데 그동안 익히고 써먹은 말하기 기술이 요사이 막내에게는 효과가 없어졌다. 이제 집에서 키가 제일 커버린 이 아이 앞에 난 한참 작은 여동생 체구로 무엇을 권고할 수 있단 말인가. 참, 내 형편은 지금 이러하다. 거기에 한국말과 영어 사이는 태평양 바다만큼 깊고 넓다. 이 망망대해에서 아들과 엄마로 순간순간 만난다는 생각을 요사이 지울 수가 없다. 그렇지만 엄마라는 이름표를 다시 어깨에 붙이고 나는 권고가 아닌 제안을 시도했다.


엄마 : 막내, 방 청소하겠다고 말한 지 며칠 지난   것  같은데?

막내 : 방 청소했어요!

엄마 : (내심 너무 좋아서 얼굴에 미소가 피어남) 아이, 그럼 그렇지. (방을 둘러본 후) 근데 왜 쓰레기통이랑 옷들이 그대로야?

막내 : 한 달 전에 했다는 말이에요.

엄마 : !$&! ... 무슨 말이야?

막내 : (방 청소에 관한 고견을 발표함) 한 달 전에 청소했는데 지금 이렇게 되었잖아요? 그래서? 지금 청소해도 한 달 후에 또 이렇게 될 거잖아요? 그래 서어?? 그러니까 해야 하느냐고요?  할 이유가 있어요?

엄마 : (궁지에 몰린 표정) 그러게, 왜 청소를 하지... (나도 하기 싫어서 네 방은 네가 해라 떠넘기려는 건데)


   이 아이는 사는 일, 반복되는 일상의 허무를 벌써 알았다는 말인가. 나는 늘 막내에게는 꼭 낚이는 기분이 드는 건 왜인지 모르겠다. 내 심각함을 웃음으로 바꾸어버릴 줄 아는 능구렁이 담 넘듯 하는 이 아이의 넉살을 어찌해야 한다 말인가.


    내 화두는 순간 청소에서 <시지프스의 신화>로 건너뛰고 말았다.  확장되었다.


   그래,  사는 일이 이와 같은가 보다 막내야. 무거운 바위를 어깨에 걸머지고 겨우겨우 언덕 마루까지 끌어올렸는데 올려놓자마자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기우뚱 다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무참히 쳐다보는 일. 일상이 이러하구나 막내야. 그러나 그 바위를 향해 뚜벅뚜벅 다시 걸어 내려가야만 하는 것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 하데스 신이 바위가 늘 그 꼭대기에 있게 하라고 명령했기 때문에 해가 뜨면 다시 그 무겁고 차가운 바위를 굴려야만 한다는 거. 너와 내가 사는 하루하루가 이와 같다는 것. 시지프스에게 내려진 형벌이라고 하던데, 우리 일상은 시지프스와 똑같다는 것. 너는 청소하는 일로 이 신화를 어느새 읽었나 보구나.


   그러니 너의  청소 거부는 이 신화의 거부가 되겠네.  바위가 굴러 떨어진 아래를 내려가지 않겠다는 시지프스의 파업 선언이 되는 셈이네. 이유 있는 너의 청소 거부를 이제야 알겠네.  그래, 그랬구나. 아무렴 시지프스를 뛰어넘어야지.


   그는 살아생전에 꾀가 많고 계략이 많아서 신들의 노여움을 샀다는구나. 신들이 속아 넘어갈 정도였다니 말해 무엇할까. 천천히 흐르는 강물과 별빛이 되비치는 바다와 금수 초목을 안아 기르는 산과 날마다 새롭게 웃는 대지 속에서 삶의 기쁨을 누렸다는구나. 그러다 결국 사후에 이 형벌을 받았다는 거지.


    막내야, 신발이 나를 끌고 다니다 나를 내려놓듯 시지프스가  어깨에 걸머진 바위를 너는 내려놓거라. 암, 그 정도는 되어야지, 그렇구말구.







출처: 시지프스 신화

http://kowon.dongseo.ac.kr/%7Eseewhy/Essay/Cezips.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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