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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조앤 Mar 16. 2021

편지/심보선

시인에게 답장 쓰기


편지 

                    

                             심보선




이곳은 오늘도 변함이 없어

태양이 치부처럼 벌겋게 뜨고 집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넋 놓고 살고 있습니다

탕진한 청춘의 기억이

간혹 머릿속에서 텅텅 울기도 합니다만

나는 씨익,

웃을 운명을 타고났기에 씨익,

한번 웃으면

사나운 과거도 양처럼 순해지곤 합니다


요새는 많은  말들이 떠오릅니다, 어젯밤엔

연속되는 실수는 치명적인 과오를

여러 번으로 나눠서 저지르는 것일 뿐,

이라고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적고 나서 씨익,

웃었습니다

언어의 형식은 평화로워

그 어떤 끔찍한 고백도 행복한 꿈을 빚어냅니다

어젯밤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행복한 꿈이었다 굳게 믿습니다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지만

이제 삶의 고통 또한 장르화하여

그 기승전결이 참으로 명백합니다

다만 어두움을 즐겨 하기에

눈에 거슬리는 빛들에겐

좀 어두워질래? 타이르며

눈꺼풀을 닫고 하루하루 지낸답니다




지금 이 순간 창밖에서

행복은 철 지난 플래카드처럼

사소하게 나부끼고 있습니다

그 아래 길들이 길의 본질을 망각하고

저렇게 복잡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의 페이지들이 구겨지면서

아이구야, 아픈 소리를 냅니다







답·장   

  

                              조 앤



안녕하세요.

저는 이 <편지>를 받고 한참 어리둥절했습니다. 보내지 않은 편지에 대한 답장 같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묻지 않은 질문에 긴 답을 먼저 주신 셈이라고 할까요.


이곳은 오늘도 변함이 없어

태양이 치부처럼 벌겋게 뜨고 집니다

나는 여느 때처럼 넋 놓고 살고 있습니다

탕진한 청춘의 기억이

간혹 머릿속에서 텅텅 울기도 합니다만

나는 씨익,

웃을 운명을 타고났기에 씨익,

한번 웃으면

사나운 과거도 양처럼 순해지곤 합니다


그렇군요. 그곳은 어제와 다름이 없는 곳이군요.  여전히 태양이 벌겋게 뜨고 그 아래서 무료함을 이기지 못하여 청춘의 기억텅텅 소리 나게 두드리고,  무성영화로 남은 사나운 과거하게 떠올리며 씨익, 웃시는 날들이 여러 날 계속되고 있다는 말씀이군요.


요새는 많은  말들이 떠오릅니다, 어젯밤엔

연속되는 실수는 치명적인 과오를

여러 번으로 나눠서 저지르는 것일 뿐,

이라고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적고 나서 씨익,

웃었습니다

언어의 형식은 평화로워

그 어떤 끔찍한 고백도 행복한 꿈을 빚어냅니다

어젯밤엔 어떤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행복한 꿈이었다 굳게 믿습니다


그렇지요. 언어의 형식이 평화롭기는 합니다. 글이 칼이 되어 저의 웃자란 상념의 곁가지들을 쳐내지도 못하고, 글을 칼처럼 냉철하게 세우지 못하니  저의 헛 열망들을 냉각시키지도 못하는 걸 보면.


내 신세가 처량하기도 하지만

이제 삶의 고통 또한 장르화하여

그 기승전결이 참으로 명백합니다

다만 어두움을 즐겨 하기에

눈에 거슬리는 빛들에겐

좀 어두워질래? 타이르며

눈꺼풀을 닫고 하루하루 지낸답니다


그렇지요? 글을 날 서게 깎지  않으니 세상의 널린 고통과 아픔의 고백들이 한낱 뉴스거리일 뿐 저와 상관없는 거리에서 바삭하게 마른 낙엽으로 나뒹굴고 있는 걸 보면.


나를 살리는 글이 아니 되니 남도 살릴 수 없어 아침마다 행복한 꿈을 꾸었을 거라 다독이고 마다 헛 위로로 타이르며 눈꺼풀을 닫지 않으면 어찌 하루하루지낸답니까?


   저는 <글>에 대하여 묻지 않았는데 독백이 방백이 되어 저에게 닿아버렸습니다.


지금 이 순간 창밖에서

행복은 철 지난 플래카드처럼

사소하게 나부끼고 있습니다

그 아래 길들이 길의 본질을 망각하고

저렇게 복잡해지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 마음의 페이지들이 구겨지면서

아이구야, 아픈 소리를 냅니다


   <행복>이 있기는 한지요? 행복이 무엇인지 제게 가르쳐 주실 수 있습니까?


바른길, 옳은 길이 있다고  알았습니다. 무던히 그 길들을 가고자 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상대로 지금 긴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마스크 한 장은 제 얼굴을 가리더니 가던 길마저 함께 덮어버렸습니다. 사는 본질을 흩어놓았습니다. 길이 복잡해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젠.


사는 일에 관하여 한 페이지 정도 제가 알았다 한들 얼마를 알았겠습니까? 아직은 쓰고 읽고 채워야 할 일상의 페이지들이, 글들이 빈 원고지 칸칸 여분으로 남아있습니다. 창밖 총총한 별들과 같습니다. 마음 같아선 그동안 토해낸 마음의 페이지들을 구겨서 쓰레기통에 처넣으려니 '아이구야' 아픈 소리를 냅니다.


      사라진 길을 찾지 않으려 합니다.

      새 길을 내야겠습니다.

      밖에서 저에게 닿았던 길이 아니라

      저에게서 뻗는 길, 시작하는 길을 내어야겠습니다.



보내주신 긴 편지가 저의 안부를 묻는 줄 알겠습니다. 길게 저의 안부를 물으심은 오래 저를 생각하셨음으로 받겠습니다. 답을 먼저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답 맞추기 급급한 인생이었습니다. 거꾸로 답 같은 편지를 주셔서 제가 질문 앞에 나아가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질문은 질문일 뿐입니다. 질문은 흉내 낼 수 없습니다. 질문엔 옳고 그름, 정답이 있을 리 만무입니다.


귀한 <편지>를 봄의 첫 소식으로 환하게 받았습니다.


저는 지금 바닷가 우체국 앞에 나와 있습니다.

고래 한 마리가 반갑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태평양 바다를 건너는 사이

편지는 더 깊어지고 더 파랗게 될 것 같습니다.

하얀 구름을 우표로 붙입니다.


추신 : 창밖에 철 지난 플래카드 갈매기가 물고 있는지 확인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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