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한 자루와가죽신 한 켤레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는 아들이 없어서 델포이에 있는 아폴론 신전에 가서 신이 맡겨놓은 뜻, 신탁을 알아보았다. 장차 아들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인지, "사람의 우두머리여, 아테나이에 이르기까지 통가죽 부대를 풀지 말라."라는 신탁을 받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테나이 왕 아이게우스는 트로이 젠이라는 국가에 들러 술을 한껏 마셨다. 통가죽 부대를 풀지 말라는 말은 술 먹지 말라는 신탁의 내용이었다. 취중에 트로이 젠의 공주와 잠을 잤다. 아이게우스는 장정 서넛이 들어도 들릴까 말까 한 왕궁 객사의 섬돌 한 귀퉁이를 들고 돌 놓였던 자리에다 가죽신 한 켤레와 칼 한 자루를 놓고는 돌을 그 자리에 내려놓았다. 공주 아이 트라에게 은밀히 당부했다. " 아들을 낳고, 그 아들이 제 근본을 궁금해할 나이가 되거든 아비를 찾아 떠나보내세요. 내가 섬돌 밑에다 신표를 감추어 두었으니, 제힘으로 댓돌을 들 만한 힘이 생기거든 보내세요. 아무도 모르게, 은밀하게..."
어머니 아이트라는 아들 테세우스가 자라자 아버지 아이게우스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테세우스는 무거운 섬돌을 가볍게 들고는 아버지가 남긴 신표를 꺼냈다. 짧은 칼 한 자루와 가죽신 한 켤레였다. 칼은 무엇인가? 무사에게 칼은 생명이다
그러면 신발은 무엇인가? 성(聖)과 속(俗),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 놓이는 이정표, 벗어 놓고 떠나는 자의 정체를 증명하는 신분증과 같은 것이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 앞에서 벗어야 했던 물건, 육신을 거두어 세상을 떠난 달마 대사가 무덤에다 남겨 놓았던 유일한 물건이 바로 신발이다. 신데렐라와 콩쥐를 찾는 데 결정적인 단서 노릇을 한 것도 바로 이 신발이다. 투신자살하는 사람은 신발을 벗어 두고 물에 뛰어드는 법이다. 신발이 무엇인가? 이승에서의 삶이다. 애인이 오면 버선발로 뛰어나가는 게 제격이다. 한 사람의 역사가 적히는 이력서(履歷書)가 무엇인가? 신발(履) 끈 자취다. 고무신 거꾸로 신는 것은 무엇인가? 운명의 뒤집기다....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영웅 열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