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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쓰조앤 Apr 26. 2021

열무김치 담글 뻔했던 결혼기념일

I Choose You

결혼기념일을 깜박 잊고 지나게 될 줄 나는 몰랐다.
아니 그런다는 말을 들었을 때 어이없어했었다. 말도 안 돼, 무슨. 그런.. 말이 돼? 말은 여전히 안 되는데 당일을 잊을 뻔했던 건 벌써 몇 번째다


새해가 와도 남편은 무심했다. 오늘 지나고 맞는 내일일 뿐이었다. 말이 돼? 오늘이 그믐인데? 뭐가 틀리는데? 해가 바뀌는 거니까 다르지. 그래서?.... 한순간 나는 호들갑 떠는 사람이 되었다. 장단을 맞춰주지 않아도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는데, 올핸 나도 흥이 안 났다. 이리 멋없지는 않았는데, 이것을 코로나 때문이라고 덤터기를 씌워볼까나. 세월 탓을 할까나.


퇴근 후 소파에서 하루 종일 서있던 고단한 다리를 하늘로 올리고 반쯤 누워있는데 배달 박스 하나를 건네받았다. 수취인이 남편 이름이었는데 내 것이라고 열어보라 했다. 나는 무심히 박스를 열었다. 새 스마폰이었다. 내가 여전히 연필로 쓰는 방식이 좋더라는 말을 기억했는지 노트 버전이었다. 거기에 5G.

어, 셀폰이네. 가만, 오늘 며칠이지? 아, 고마워. 새것은 뭐가 되었든 좋긴 하다. 화면이 크네. 적응한다더니, 이런 작은 화면으로 영화, 드라마 어떻게 보나 했는데 이젠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어.

무뚝뚝하게 무 낭만적으로 건네주는 바람에 나 역시 평소의 소란스러움 없이 무심히 받아 들고 말았지만 많이 고마웠다. 결혼기념일을 앞두고 혼자 이게 좋을까 생각하며 골랐을 거라 생각하니 그 마음이 환한 꽃으로 전해졌다.

@Pinterest

사실 이번엔 나도 새로웠다. 남편이 아니라 셀폰이(!?) 그전엔 전화기라는 생각이 앞섰다. 전화기에 컴 기능이 부과되어 있다는.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컴퓨터에 전화 기능이 부가되어 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나는 학교에서 무지막지한 크기의 컴퓨터를 전산실에서 배웠다. 책상 하나를 다 차지하고 있던. 그때를 떠올리자 기술 혁신이라는 말이 새삼 실감되었다. 그렇게 컸던 컴퓨터가 지금 내 작은 손안에 들려있다는 것. 메모리 용량을 비교하면 그야말로 눈부신 기술 혁명을 내 코앞에서 확인하는 놀라움. 새로웠다.


엄청난 최신 무기를 입수한 것 같았던 나는 다음날 케이크를 사러 한인 마트에 들렀다. 오늘은 결혼기념일이다. 케이크만 사자. 다른 건 일체 사지 말자. 집에 가서 맛난 저녁을 먹고 맛있게 케이크 먹으며 우아하게 결혼기념일을 기념하자.

카트도 끌고 가지 않으려던 마음은 그래도로 바뀌었다. 별생각 없이 야채 코너로 들어서자 싱싱한 <열무>가 보였다. 사면 오늘 만들어야 하니 지나쳐야 했다. 한국 야채를 맘먹을 때마다 구하기 어려운 적이 많긴 했다. 그렇지만 결혼기념일에 열무김치를... 생각하니 한순간 복잡해졌다. 그러나 너무나 싱싱한 열무를 보자 여름이 오기 전까지 다시는 못 볼 것처럼, 남편에게 도와달라 하면 되지 하고는 샀다. 나쁘지 않을 것 같네 뭐. 결혼기념일에 둘이서 열무를 다.정.히 다듬는 거. 예상했던 기념일 시나리오에는 없던 장면이었지만 대본은 쉽게 수정되었다. 카트엔 케이크는 사지도 않았는데 하나씩 하나씩 물건들이 차기 시작했다.


한산해 보이는 계산대 앞으로 가서 산 물건들을 주섬주섬 올려놓았다. 중국 남자 직원이 서있었다. 아직 앳된 얼굴이었다. 올린 물건들을 확인하던 그 직원이 물었다. 열무가 몇 단인지를. 나는 그 사이 몇 단을 샀는지 잊어버렸다. 6단? 7단? 8단? 남자 직원이 손으로 하나씩 꼼꼼히 세더니 7단이라 하며 웃었다. 그동안 나는 후다닥 직원이 확인한 물건들을 부지런히 플라스틱 백에 넣고 다시 내 카트로 내려놓았다. 케이크만 산다고 했던 첫 마음이 무색해져 버렸다. 집에 가면 모두 내 일이 될 거라 생각하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은 아무것도 사지 말자 해놓고서는 이게 뭐지? 남편과 둘이서 같이 한다 해도 좀 너무했구나. 물건 고르랴, 고른 물건 계산대에 올려놓으랴, 직원이 확인한 물건들 백에 넣어 다시 내 카트에 옮기랴, 카드 결제하랴. 나는 무심결에 왜 손님이 직원보다 더 바쁜지 모르겠다고 웃으며 말했다. 남자 직원도 따라 웃으며 내게 물었다. Do you have a Restaurant? 엉? 무슨 말이냐는 표정을 내가 짓자 너, 식당 하냐는 말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다시 묻자 너는 매번 쇼핑할 때마다 물건들을 많이 샀다는 것이 아닌가. 뭐? 내가? 네가 기억할 정도로? 어머, 정말! 헉. 식당을 하는 사람임이 분명해 보였다는 거다. 이렇게 장을 많이 보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고. 난 그만 팡하니 웃음보가 터졌다.

그러고 보니 밖에 나가서 사 먹지 않은지 1년이 넘었다. 둘째만 학교 근처 아파트에 나가 있으니 어른 네 명이 집에서 매일 볶다 거리고 있어 나에겐 별스럽지 않은 쇼핑이 그 남자 직원에겐 특별하게 보였던 거였다. 장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2-3주 간격으로 장 보러 나가기 때문이기도 했다. 매일 나오는 쓰레기 양도 많이 늘었다. 그전처럼 냉장고에 쌓이진 않았지만 음식을 사고 만들고 치우고 정리하는 시간은 많이 길어졌다. 남편의 협조가 따라서 늘지 않았다면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불만도 따라 늘었을 것이 뻔했다.


마트에서 계산을 끝낸 후 잊지 않고 결혼 기념 케이크 하나는 샀다. 나의 미련함도 얹고 집으로 돌아왔다. 고기를 구워 늦은 저녁을 먹고 나니 케이크는 결국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싱싱한 열무는 커다랗고 깨끗한 새 쓰레기봉투에 곱게 싸서 도로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오늘 안에 끝낼 수 없는 일이었다. 끝내고 싶은 일도 아니었다. 내일로 미루었다. 내일 나는 출근해야 한다. 남편이 말하던 어제를 지난 오늘 하루가 무사히 지나갔다. 나에겐 열무김치 담글뻔했던 결혼기념일. 최신예 기술 혁신 기기에서 감미로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I choose you...

Lettering. Joanne @Pinterest


https://youtu.be/ooiLP_zqnF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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