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태평양일기 코너 속에 코너 - 칼리만탄 일기 4탄
희망차게 시작해서 시무룩하게 마무리한 하루다.
이슬람 신도가 90% 에 가깝다고 하는 인도네시아이지만 칼리만탄섬은 가톨릭과 개신교 성도들이 더 많은 편이다.
인터뷰이를 섭외하려면 교회를 가는 게 좋겠다는
마을 대표 무사 씨의 조언을 듣고선 아침 일찍 교회로 나섰다.
한국에서 참석했던 예배와 다른 점이 있다면
헌금 대신 쌀로 봉헌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헌금 타임을 설교 전 1번, 설교 후 1번 총 두 번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번 칼리만탄섬 방문이 모쪼록 잘 풀리길 마음을 담아 기도를 올려드리고 예배를 마친 후 희망차게 인터뷰이를 찾아봤으나, 내가 찾던 두 성도가 오늘 교회를 안 나왔다는 거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친구 디코는 내일부터 또 다른 섬에 출장을 갈 일이 있어 점심 후 웨스트 칼리만탄 주도인 폰티아낙으로 떠났다.
여전히 몇 도인 지는 알 길이 없었지만 더위가 정점을 찍었고 양 팔은 땀띠가 덕지덕지 올라와 도무지 징그러워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나마 오늘은 선풍기를 하나 들여와서 다행이지만
선풍기라도 없었으면 아마도 더위 먹고 정신을 잃었을 듯싶다.
그렇게 하루를 하릴없이 기다리다가 저녁에야 겨우 첫 인터뷰이를 만났다.
말레이시아 기업이 운영하는 팜유 농장에서 일하는 두 명의 여성노동자였는데 내가 예상하고, 내심 기대했던 답변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인권 침해 같은 것 전혀 없고, 복지가 너무 잘 되어 있는데 돈까지 벌 수 있어서 너무 좋다는 거다.
그동안 NGO 보고서나 언론 기사, 학술지에서 봐왔던 것과는 너무 다른 답변이었다.
두 분께는 정말 잘 된 일이지만, 머릿속엔 물음표가 둥둥 떠올랐다. 일단 나의 가설을 완전히 거스르는 답변이었고, 이 마을에 기업이 운영하는 농장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는 이 두 명뿐인데, 더 이상 이 곳에 있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질문과 함께 어제부터 계속 겉돌았던 생각이지만 차마 결론을 내리지 못했던, 번지수 잘못 찾았다는 느낌.
어렵게 얻어낸 인터뷰인 만큼 마무리는 했지만 혼란스러웠다.
환경, 인권 쪽 NGO들도 현실보다 부풀려서 최악의 상황만 강조하는 건가?
사실 주민들은 살만해져서 좋은데 괜히 인권단체랍시고 기업들한테 태클 걸어서
주민들만 더 힘들어지게 만드는 걸까?
아니면 혹시 인터뷰이들에게 부정적인 답변은 하지 말라는 압력이 가해졌나?
하지만 마지막 들은 의문은 한낱 대학원생의 논문 때문에 그렇게까지 하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고.
아무튼 한마디로 오늘 인터뷰는 망했다는 생각에 시무룩해져서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인도네시아 팜유 인권 이슈 전문가인 디코는 자꾸 내 논문과는 상관없는 질문들을 카톡으로 보내면서 이거 물어봤냐, 저거 물어봤냐 하는데
어떤 상황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시비 거는 사람 같아서 신경질이 났다.
당장 내일은 누구를 만날 수 있을까.
일단 개인농장에서 팜유 열매를 수확하는 이웃집 아주머니 농장에 방문하기로 했다.
열매 수확하는 것도 좀 도와드리고, 이것 저것 물어볼 참이다. 하지만 역시 내가 찾는 조건에 맞지는 않는다. 왜 여기까지 와서 삽질을 하고 있나 싶어서 마음이 안 좋다.
디코에게는 미안하지만
왜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하지 못해서 이런 사달이 났는가 싶다. 애초부터 카푸아스 훌루 한 곳만 가겠다고 했는데 세 군데나 어레인지를 했는지,
왜 내 논문 질문과는 상관없는 걸 자꾸 지적하는지,
디코, 미안한데 오늘 밤은 너한테 화를 내고 싶어.
그는 아마도 내가 이럴 줄 알고 부리나케 폰티아낙으로 넘어간 것 같다.
그래도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걸 하고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선 너무 얽매이지 말아야겠지?
그나마 밖에 반갑게도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내일은 아무쪼록 희망차게 마무리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