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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 Jul 31. 2018

쇼핑 좋아하는 미니멀리스트


“우리 결혼하면 꼭 필요한 것만 사자. 가구도 사지 말고. 왠만한 가구도 다 포함되어 있는 집으로 들어가면 되니까. 언제든 캐리어 하나에 짐 싸고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어.”


라고 말했던 DW이다. 소비를 줄이려고 늘 생각은 하지만 맥시멀리스트의 피가 흐르는 나는 진짜 미니멀리스트를 만난 것 같아 살짝 긴장했다.

캐리어 “하나”에 “언제든” 짐을 싼다고? 작년 고작 6개월 방콕에 살다가 생겨난 짐이 50kg에 가까웠던 나였다. 게다가 한국을 떠나 사는 것은 좋지만 아무때나 훌쩍 떠날 수 있는 내가 아니란 것도 이제 안다.


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방콕에 잠시 들른 DW가 제일 먼저 가고 싶어 한 곳은 시암(Siam)이었다. 방콕에 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봤을 시암은 쇼퍼들의 개미지옥이다. 시암 파라곤, 시암 센터, 최근 리뉴얼하여 한층 럭셔리해진 시암 디스커버리에...길을 건너면 시암 스퀘어를 시작으로 보세 쇼핑 거리가 펼쳐지고, 파라곤에서 바로 연결된 다리를 조금만 걸으면 방콕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센트럴 월드, 요즘은 한풀 꺾인 마분콩 (MBK) 센터까지 모두 모두 모인 그곳. 그렇게 그의 쇼핑은 시작되었고, 방콕에 지내는 동안 계속 되었다.




정말이지 깜빡 속을 뻔했다.


그리고 안도의 숨을 쉬었다.


나와 그렇게 다르지 않은 사람이구나.




사실 DW는 쇼핑왕이었다. 방콕에 오자마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모든 걸 갈아치웠다. 모자에서부터 티셔츠 몇 벌, 셔츠 몇 벌, 반바지와 긴바지, 신발은 몇 켤레를 샀더라, 네 켤레였나 다섯 켤레였나. 참, 선글라스도 새로 장만했는데 이건 신발 두 켤레 사서 받은 사은품. 세일 표시가 있는 매장은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심지어 요리에 관심도 없으면서 후라이팬까지 살 기세였다. 얼마 전에는 ‘럭키 프라이데이'를 맞아 자정까지 시암 파라곤을 접수했더랬다. 잠깐 나비넥타이나 보러 들어갔던 매장에서는 초심을 잃고 (잘 신지도 않을) 구두를 사는 식이다. 얼마전 생일을 맞아 선물은 이 모든 걸 담아 갈 수 있는 특대형 캐리어를 부탁했다.


쇼핑왕 DW와 럭키 프라이데이: 시암 파라곤에서는 간혹 금요일밤 8시부터 12시까지 한정세일을 한다.


전에도 적은 적이 있지만 나의 이상은 ‘미니멀리스트’이지만 현실은 ‘맥시멀리스트’로 살고 있다. 제대로 미니멀라이프를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서 나 또한 소비 패턴을 바꿔 보겠노라고 생각했던 것도 잠시, 우리는 함께 ‘어머 이건 꼭 사야 해!’를 외치며 ‘참 좋은 소비였다’ 하며 매장을 나오는 것이다.


얼마 동안 가까이 지내면서 DW에게 있어 미니멀리스트라는 것은 대체 뭘 뜻하는 것일까 생각도 해보았다. 아무래도 ‘소비’에 대한 미니멀리스트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으로 잠정 결론을 지었다. 그러니까 DW는 쇼핑을 좋아하고, 많이 하는 미니멀리스트인 것이다.  



소비에 방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면, 그는 생활과 의사 결정에 있어 심플하다. 어쩌면 나와 가장 다른 부분일 것이다. DW는 오래 고민하지 않는다. 쇼핑할 때뿐 아니라 무엇을 알아보거나 결정할 때도 그렇다. 나는 뭘 하나 결정하는 데 오랜 시간을 들이는 편이다. 좋게 말하면 신중과 꼼꼼, 꼭 나쁘다 볼 순 없지만 결정 장애일 때도 많다. 그는 관심 가는 것이나 찾던 것을 발견하면 바로 낚싯대를 던진다. 연락을 하고 문의를 한다. 생일 저녁으로 폭립을 먹는 작은 결정이든 방콕에서의 일자리 탐색이든, 혼인신고와 같은 '인생 결정'이든 직진하고 본다.  

반면 나는 사전 조사를 많이 하는 편이다. 검색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묻고 생각하고 잠시 시간을 두었다가 또다시 알아보고 고민해보고 결정을 내린다.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들기 위해 블로그, 카페, 인스타그램, 구글맵, 온갖 리뷰도 들여다보고 그 날의 일정과 동선도 고려한다. 더운 날 많이 걷게 되지는 않을지, 요 며칠 고기음식을 너무 많이 먹어 건강을 해칠지는 않을지 생각하는 것은 기본이다. 물론 점심과 저녁의 공복 텀이 짧아 디저트 먹을 타이밍을 놓치면 어쩌지?라는 고민은 당연히 나의 몫이다.  
 

여행을 할 때도 우리의 다른 점이 드러난다. DW는 우선 티켓을 끊는다. 숙소는 예약하지 않는다. 숙소는 현지에 도착해 마음에 드는 동네가 있으면 워크인으로 정하는 게 DW의 여행 패턴이다. 나는 숙소 예약은 반드시 먼저 해야 하는 편이다. 낯선 곳에 내 몸을 누일 곳을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왕 비슷한 금액을 낼 것이라면 미리 예약해둬야 더 좋은 방 - 이를테면 1층보단 2층, 빛이 잘 든다던가, 통풍이 잘 된다던가, 와이파이가 더 세다던가 - 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고 짐을 내려놓고 내 영역을 지정한 후에 그곳에서 이동이 용이한 곳들을 가는 편이다 (물론 가고 싶은 곳을 먼저 정해놓고 그 주위에 숙소를 정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나는 2박 3일 여행을 가더라도 맥시멀 하게 동선과 맛집, 깔끔하고 안전한 동네, 대중교통 유무 등을 따지고 고민하고 결정한다면 DW는 티켓 끊고 우선 도착해서 마음 가는 대로 지르고 보는 것 같다.


쇼핑할 때도 지르고 여행도 지르고 결혼 후 함께 살 곳까지 질러버릴까 걱정이 되지만 나와 다른 그를 보며 오히려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새롭게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다행히 다른 점은 많지만 함께 있을 때 즐겁다. 급하게 수습하는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일 거다.


참, 글을 마무리하며 그가 방콕에서 산 신발 수를 정확하게 세어보았다. 여섯 켤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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