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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Sep 29. 2018

증명의 대가

공항에서 제대로 증명해내는 데 실패하면 피눈물 흘리게 된다는 것은 겪어보지 않는 것이 좋다. 시에라리온으로 가는 길은 예견된바 대로 불행했다. 환승 공항마다 직원들에게 잡혀 시에라리온은 도착비자로 입국이 가능하다고 우겨댔다. 당시엔 ‘당신들이 잘못 알고 있어! 시에라리온에 가 본 적도 없으면서 이러지 말라구요!’ 하는 심정으로 진실 되게 주장했지만 결국 나는 우기고 있었다는  후에 밝혀졌다. 피곤하게 해서 미안했어요.


소속마저 증명되지 않았다면, 나는 당장 본국으로 귀환하는 저주받은 운명이 되었을 것이다. 방콕에서  시간, 케냐에서 한 시간 입씨름하느라 영어실력은 하룻밤 새 큰 폭으로 성장했다. 혹시 하는 불안함에 과하게 챙겨간 모든 서류를 꺼내 들고 당당하게 우긴 덕분에 나는 억지로 공항을 통과했다. 그때 나에게 질렸다는 듯


우선 보내주겠지만 넌 분명히 입국할 수 없을 거야.


라고 했던 분들은 시에라리온의 공항 시스템을 나보다 훨씬 더 신뢰했던 것이다. 다행스럽게 시에라리온의 공항은 (그때만큼은) 내편이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현지 직원이 쓴 덕에 무리없이 공항에서 나를 증명할 수 있었다.



가장 좋지 않은 경우는 금전적인 대가를 치르게 될 때다. 살면서 그때만큼 당황하고 놀란 일이 많지 않다. '안됐지만 도울 방법이 없으니 살 수 있는 티켓이 있는 지나 알아보는 게 좋겠군요.'라는 승무원 앞에서 폴란드행 티켓을 파격적으로 싼 값에 샀다고 좋아했 수개월 전의 나를 떠올렸다. 미래를 모르고 성급하게 웃어대다니. 한심하게.


멍청하게 엄마의 여권상 이름을 잘못 적어놓고 8개월 간 발견하지 못 것이다. 엄마 이름을 제대로 증명해내지 못한 나의 실수. 그동안 그렇게 많은 비행기를 타면서 한 번도 없었던 어리석은 실수였다. 싸게 샀던 표는 무용지물이 되었고 자칫하면 공항에 엄마를 남겨두고 동생이와 둘이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엄마는 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옷도 사고 캐리어도 사고 신발도 샀는데. 그 모든 것을 들고 다시 집으로 보내야 한다고? 이건 살면서 할 수 있는 가장 큰 불효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뭔가 문제가 생긴 거 같지만 어서 해결하고 면세점에 가자. 배고프니까 뭐도 좀 먹고 싶다고 아까부터 얘기했는데.’ 하는 엄마와 ‘상당히 나쁜 일인 것 같지만 엄마를 불안하게 할 순 없으니 입 다물고 있을게. 빨리 어떻게 좀 해봐.’하는 동생이를 등지고 나는 다급하게 새 티켓을 구해야 했다.


회사가 중국에 있는지도 몰랐던 여행사 직원과 통화하기란 쉽지 않았다. 국제선 상담 라인은 도통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점점 피가 마르고 뇌에 산소가 부족해다. 엄마에게 표정을 들키면 안 된다. 등을 돌리면 안 되니까 연결이 될 때까지 이대로 있어보자. 전화를 좀 받으라구요!!!


10분 만에 국내선 상담 라인을 통해 시급성을 알라고 국제선 상담직원과 마침내 연결이 되었다. 나는 이미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제가요...”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표를 새로 주세요.라고 사정하다시피 말했다.


제발 엄마를 공항에 남겨두는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얼마든 상관없으니까 빨리 표를 주세요.



여행사 직원이 무려 4배나 비싼 티켓을 제시했지만 당시로써는 그저 엄마와 함께 공항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 그거 주세요. 그걸로 새로 예약할게요. (당장 주세요. 누가 집어가기 전에 빨리요. 빨리.)


이 이야기는 엄마와 동생이에겐 무덤까지 비밀에 부치기로 하자. 이제야 혈색이 돌아오고 차가웠던 손발에 온기가 오른다. 새 티켓을 확정 짓고 이제 등을 돌렸다.


응, 엄마 괜찮아. 수수료 조금 냈어.
얼마 냈는데?
응? 어, 어 10만 원 정도 냈어.
아휴. 비싸다. 아까워. 공돈 버렸네.
(엄마, 지금 10만 원이 비싸다고 하면 안 되는데요. 흑흑, 공항이란 이렇게 증명이 중요한 곳이군요.)


엄마는 면세점에 들어선 후에도 한참을 10만 원이 아깝다고 말했다.


아우, 아까워. 속상해. 뭐 그렇게 비싸.
(엄마, 저는 지금 10만 원쯤은 떡볶이 값처럼 보이는 상황을 막 넘기고 와서 이 면세점 구역이 선택받은 사람들만이 들어선 가나안 땅처럼 보일 지경이에요. 10만 원 같은 건 잊으세요.) 됐어. 어쩔 수 없지 뭐.



이름을 증명하는 것은 값비싼 일이다. 항공권 예약할 때 백번 확인해야 할 만큼 충분히 비싼 일이다. 공항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모두 증명하고 통과한다. 공항의 공기 밀도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증명해야 하는 사람들이 내쉬는 불안의 숨 자락 때문이기도 하다는 걸 이제는 알게 됐다. 공항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출국 신고를 마치고 게이트로 향하는 구간이다. 그곳에서는 현실과 잠시 코드를 끊어버리고 새로운 낭만의 세계로 넘어가기 전 점이지대에 숨은 기분이 든다. 가상공간으로 가는 통로 같은 곳. 증명해냈고, 목적지는 명확한 곳. 더 이상 불안이 없는 곳.


나를 증명해내고, 확인 도장을 받고 안전지대에 들어가고 싶다. 증명해내기는커녕 무엇으로 어떻게 나를 어떻게 증명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빨리 통과하고 싶은 구간에 머무르고 있다. 불안으로 공기를 흔드는 사람 중 하나로 여기에 멈춰 있다. 아직 통과하지 못한 채로. 모두가 통과하는 공간에서 여전히 증명하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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