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 입학하자 교내 시 창작 대회가 열렸다. 1등도 뽑았다. 시와 서열이란 가장 이질적인 조합을 상상하는데 그치지 않고 시행했다는 것이 놀랍지 않았다. 1등을 한 것은 1등에 익숙한 아이였다. 전교 1등을 주로 하다 가끔 2등을 하면 실패한 혁명가 같은 표정이 되는 애였다. 시 대회가 있었는지 조차 까먹을 무렵, 1등으로 뽑힌 시를 낭독해주겠다며 선생님이 거울을 주제로 쓴 시를 후다닥 읽어주었는데 무슨 뜻인지 하나도 이해를 못했다. 선생님이 후다닥 읽어서인지 내가 딴생각을 해서인지 시심이 없어서인지 모르겠지만 선생님은 잘 쓴 시라고 했다.
‘아, 시는 암호처럼 써야 하는구나. 앞뒷 말이 이직 후 처음 만난 동료들처럼 어색하게 붙어 있는 것이 ‘함축’ 이란 것이구나. 평범한 16살은 이해 못하는 게 시인가 보다.’ 생각했다. 태어난 후로 나는 늘 세상에 한 꺼풀 비늘 막이 둘러쳐진 것 같았다. 시원스럽게 선명하게 세상을 읽으려면 나이를 먹으면 될 줄 알았다. “나는 너무 젊었으나 내 주위에는 늙디 늙은 비밀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아직 괜찮다. 시간은 충분하다.
그보다 더 자라서는 종종 시집을 추천받아 읽었다. 아끼던 프로그램이 막을 내렸고, 정직한 시대의 목격자가 되지 못하고 출세에 눈이 먼 놈들이 썰물의 갯벌처럼 드러나던 때였다. 그때도 나는 어렸나 보다. 단골 술집에서 안주빨 세우며 두부 스테이크, 캐슈너트 닭볶음, 생선구이를 해치우느라 나는 맞은편에 앉아있는 슬픔을 조금만 이해했다. 시대를 기록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 시를 쓰지 않는 시인들에게 화가 난 슬픔이었다. 지금 써야 할 시를 누가 쓸 것인지 지켜보고 있는 눈에 술잔과 내가 먹어치운 접시들이 어렸다. 슬픈 접시에는 그 눈에서 빠져나온 분노와 울분이 넘쳤다. “시간이 매일 그의 얼굴을 조금씩 구겨놓고 지나간다.”
시집을 챙긴 여행은 처음이다. 시집 한 권 읽기가 이렇게 오래 걸릴 줄도 몰랐다. 몇 번씩 읽어도 아직 덜 읽은 것 같아서 책장이 자꾸 앞으로 돌아간다. 비행기 안에서 읽다가 잠이 들고, 매연이 실시간으로 풍성하게 생산되는 활기찬 도시에서 코코넛 커피를 마시고 당근케이크를 흘려가며 읽는다. 아사히 볼을 한쪽에 밀어놓고 읽다가 다시 그릇을 끌어와 죽처럼 떠먹으며 읽는다. 호텔 소파에 기대 읽다가 좋은 것은 적는다. 적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가 처음부터 읽는다. 동양적인 차를 무국적 잔에 따라 마시며 읽고, 퍼석한 마카롱을 조금씩 베어 먹으며 시를 읽는다.
이제야 오래된 비밀들의 부스러기를 조금씩 읽어내고 있는 기분이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나 언어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시가 언어가 되는 때를 만난 것이다. 시를 읽으면서 슬픔을 해석해주는 언어를 배운다. 왜 어린 시절의 내 곁에는 오래된, 늙은 비밀들이 많았는지도 알 것 같다. 읽어주고 해석해주는 사람이 없는 언어로 된 비밀들이 기다리다가 늙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대를 읽어주는 시인이 없어 울분을 끄억 거리던 지인처럼.
아직도 세상은 한 꺼풀 장막 뒤에 있다. 속 시원히 읽히지 않는다. 시집도 의미를 온전히 읽어내긴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를 조금씩 헐어내면서 읽다 보니 그 안에 기대하지 못한 안위가 있다. 그래서 대충 생각나는 대로 정갈하지 않은 글자를 적어 내려간다. 타자기 대신 손으로 아무 종이에나 적었던 글을 다시 노트북에 옮기면서 시를 생각한다.
계획도 하고 싶은 일도 없이 날아온 도시에서는 시간이 더 이상 숫자로 대표되지 않는다. “오늘 나는 흔들리는 깃털처럼 목적이 없다.” 어떤 식으로든 낭비해도 상관없는 하루. “태양이 온 힘을 다해 빛을 쥐어짜 내는 오후.” 길을 잃으면서 걷는다. “가능한 모든 변명들을 대면서 길들이 사방에서 휘고 있다.” 도로 안에 갇힌 것 같다. 그래도 걷다 보면 결국 어딘가 나오겠지 하고 보채지 말자고 생각하면서 걷는다. 낭비해도 상관없는 하루니까.
길을 걸으면서 또 생각한다. “언젠가는 좋든 나쁘든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나리라 믿었다.” 그러나 결정적인 일들은 원할 때는 벌어지지 않고 생각조차 없을 때 들이닥쳐 영 나와는 합이 맞질 않았다. 내 삶에도 낭비해도 되는 시간, 실패가 용인되는 시간이 있으면 좋겠다. 그렇다면 결정적인 일들이 일어나길 기다리지 않고 내가 결정적인 사건을 저질러 버릴 핑계가 될 텐데.
“나는 두려워졌다. 산다는 게 꼭 누가 했던 말을 되풀이하는 것 같았다. 한숨을 쉬니 입김이 뿌옇게 피어올랐다. 누군가 내 안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문득 언젠가 들었던 오래된, 조금 진부한 조언이 생각난다. 시인의 감성, 군인의 용맹함, 선지자 눈으로 세상을 살기 바란다고 했는데. 아직 한 꺼풀 뒤의 세상을 뿌옇게 보고 있을 뿐이라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싶다. 한 꺼풀 들춰낸 세계를 읽는 시인들의 언어에는 비밀이 많다. 그래서 나는 시를 여러 번 읽고 다시 앞으로 돌려 읽을 수밖에 없다.
시인이 읽어준 여행이 끝나고 있다. 매연을 매일 새롭게 뿜어내는 안식의 도시를 떠나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더러운 자국을 남기며 끌려들어 갈 차례다. “다시 돌아가려 하지 않아도 이미 돌아와 있는 곳. 평화가 린나이 보일러처럼 자알 작동하는 곳”. 해결하고 싶은 일은 여전하고 벌어지길 바라는 결정적인 사건들도 요원하다. “기다림의 부피란 언제나 일정하다. 이쪽이 체념으로 눌리면 저쪽에선 그만큼 꿈으로 부푼다." "삼십 대, 청춘은 껌처럼 씹고 버렸다. 가끔 눈물이 흘렀으나 그것을 기적이라 믿지 않았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졸음이 쏟아진다. 중심부에서 조명을 죄다 끌어 쓰는지 주위가 어둡다. 작은 불빛들이 보인다. "처방전만 하게 불 켜지는 창문들." 여기는 비밀을 읽지 못하는 타인을 위로하는 도시.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 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따옴표 안은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서 발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