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초적 기억을 따라가 보면 나에겐 마일로가 있었다. 마루 끝 저 높은 냉장고 위에 놓인 초록색 마일로 통. 엄마의 손만 닿는 곳. 나는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다. 착한 일을 하면 마일로 한 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처럼 엄마의 손이 마일로를 내려 한 잔의 코코아를 만든다.
기억 속에 각인된 마일로는 늘 하늘에서 내려온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때, 엄마와 나 둘만 있는 시간에 조용히 하늘에서 내려오는 마일로를 간절히 손 모으고 기다리는 나. 회오리를 만들면서 우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코코아 가루의 신비로운 흔적을 좇는 나.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이번에는 떡볶이 냄비가 있다. 한 그릇 더 먹고 싶은 모두의 욕망 한가운데 달큰한 떡볶이를 가득 담은 냄비가 있다. 유치원에서 한 달에 한 번 떡볶이 간식을 먹는 날마다 ‘오늘은 두 그릇을 먹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했지만 성공한 적은 없다. 첫 번째 배식이 끝나기도 전에 벌써 접시를 비우고 두 번째 배식을 기다리는 아이들을 이길 방법이 없었다. 맛을 음미하지도 못하고 오로지 빨리 먹기만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그런 질문은 어리석다. 아이들에게는 그냥 많이 먹는 것 자체가 의미다. 우리 유치원 떡볶이는 그만큼 맛이 좋았다. 30년 넘게 지난 지금도 그 맛 얼핏 기억난다.
원형의 기억 이후 유구한 시간 동안 나는 이 두 가지에 질려 본 적이 없다. 초코와 떡볶이는 다양한 배합과 변형으로 나를 홀리고 길들였다. 나는 언제라도 유혹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원형의 기억에 잘 메이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각인된 기억을 모태로 행동이 조종되는 것 같기도 하다. 좋은 쪽으로든 반대로든.
최초의 기억에 의존하는 태도를 뒤집는 일도 있다. 최근에는 굴을 조금 멀리하게 되었다. 굴과의 첫 만남은 섬마을 마당 수돗가에서 시작된다. 방학을 맞아 큰댁에 가면 싱싱한 해산물을 질리도록 먹을 수 있었다. (실제론 질려본 적이 없다.) 어른들이 갓 따온 굴을 씻어서 접시에 내오면 섬 전체를 마시는 것처럼 굴에서 바다와 산, 하늘의 냄새가 났다. 편식이 심한 편인데 어떻게 굴 맛을 알았을까. 굴 맛을 깨우친 후 생굴, 굴전, 굴국밥 가리지 않고 섭렵했다.
그런데, 지난 겨울부터 서너 차례 굴을 먹고 크게 탈이 났다. 살면서 그렇게 많은 굴을 먹어왔는데 왜 하필 일 년 사이에 탈이 났는지 모르겠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된통 당하고 나니 아무리 좋아하는 굴이라도 이젠 당분간 자제하자는 마음이 들었다. 굴은 죄가 없지만 굴에 숨어든 바이러스를 피하려면 어쩔 수 없다.
최초의 각인은 기억을 조종할 수 있다. 편견을 만들기 좋은 조건이 될 수도 있다. 무섭거나 피하고 싶은 것들은 대체로 조종된 최초의 각인에서 시작된다. 지하실, 어둠, 화장실, 낯선 사람. “잠깐 보자.” 같은 말, 전화벨 울리는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이 모든 것들에 대한 각인에서 벗어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오래 걸렸는지 생각해보니 그렇더라.
나이가 들수록 기억을 입히는 일이 두렵다. 애초에 아무 기억을 입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기도 한다. 특히 사람에 대한 일이라면. 자전거 타는 법을 한 번 알고 나면 잊을 수 없는 것처럼 각인된 기억을 털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기억하지 말아야 한다.
누구나 언제나 '사연'이 있다. '알고 보니 그렇다 더라'는 함부로 비판하지 않을 조건이 될 수 있지만 그럴싸한 핑계가 될 수도 있다. 판단받는 쪽, 판단하는 쪽, 소문으로 듣는 쪽, 믿어버리는 쪽 모두에게. 사후약방문은 소용없다. 굴은 잘못이 없지만 바이러스가 있는 굴은 어쨌거나 나쁜 굴이다.
나에 대해서도 아무 기억을 입지 않았으면 하는 때가 있다.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억도 남기고 싶지 않다. 존재보다 부재를 통해 기억되는 것이 멋져 보일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아무 기억을 남기지 않는 것이 외려 좋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을 문질러 각인된 시간의 향을 끌어올려 위로받기도 한다. 기억을 선택하고 싶은 모양이다. 우선 오늘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기억을 입히지 않고 아무 기억도 남기지 않는 하루가 되면 좋겠다. 나에게도 의미없는 날이면 좋겠다. 좋은날들에 가려 별거 아니라서 애를 써도 도무지 생각나지않는 새털같은 날중 하루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