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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쿠나 Dec 16. 2018

버리지 못해 슬픈 영혼

느닷없이 고백하자면 나는 깔끔한 편이 아니다. 청소를 잘 하지 않고, 수납도 정리도 소질이 없다. 비어있는 공간을 좀처럼 가만두질 못한다. 책상 위도 한 가득, 식사 테이블도 한 가득, 화장대 앞도 한 가득, 냉장고 안팎도 한 가득, 세면대 앞 선반도 예외없이 빈 공간에게 틈을 주지 않는다.


정리의 기본은 버리는 것이라고 어디선가 주워들은 적이 있다. 여지없이 난 기본이 안된 사람인 것이다. 요즘들어 부쩍 버릴 용기가 생긴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본가 내 방은 19년 전 반 친구와 주고 받은 쪽지로 그득한 신발 상자가 쌓여져 있으며, 13년 전 발렌타인 데이 때 받은 초콜렛 상자가 나뒹굴고 있고, 고3 기말고사 꼬리표 (요즘에도 꼬리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의 세대에는 공식 성적표가 나오기 전 성적 확인용 쪽지같은 것이 있었다)에다 무려 1996년 쯔음 진지하게 임했던 취미활동을 고스란히 담아놓은 스티커북이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다. 


물건을 선뜻 버리지 못하는 나와 같은 연약한 영혼을 가진 이라면 이해할 것인데, 차마 버리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언젠가’ 필요할 것이라는 (혹은 가치를 재발견 할 것이라는) 믿음과 또 하나는 그 물건과 얽힌 기억과 마음, 그리고 그 물건과 닿아있는 사람들과의 애정을 버리는 것만 같아서이다.  


아주 아주 간혹, 한 10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언젠가’ 라는 때가 오기도 하는데 그 때가 바로 작년이었다. 지금은 남편이 된 DW가 약 14년 전 유리로 만든 강아지 인형을 선물로 준 적이 있다. “자몽”이라는 이름을 가졌다는 것까지 알려주며 나에게 풋풋하게 건넸었는데, 당시에 나는 (그 후로 13년 간) DW 가 조금도 마음에 없었지만 그래도 이름까지 있는 강아지 인형을 차마 버릴 수 없었다. 물론 애지중지 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대청소를 마음 먹고 이번엔 정말 쓸데없는 물건들은 다 버리리라 다짐해도 결국은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게 14년을 버텨온 애물단지 자몽이는 결국 내가 DW와 만나기 시작한 후로 먼지 폴폴 나는 추억의 상자에서 화장대 위 가장 잘 보이는 자리로 급격한 신분 상승을 했다.

14년 만에 재발견한 자몽이

하지만 내가 가진 1만 여가지 (라 추측해본다) 물건들 중 어느날 갑자기 요긴히 필요하게 된다거나, 운명적인 사건으로 가치를 재발견하게 된다거나, 현금화 할 수 있는 물건은 이렇게 10년 여 만에 한 번쯤 나올까 말까 한 것이다. 그런 뜻에서 나는 연말에 한국 본가로 돌아가면 나의 추억들을 가차없이 정리하려고 한다. 앞으로 ‘자몽’ 같은 아이를 재발견 하게 될 일도 없을테고, 19년 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은 방산중학교 3학년 2반 친구들과의 쪽지를 20년이 지났다고 열어볼 일이 없을 것이다.


이렇게 호탕하게 다짐해보지만, 추억이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면 ‘언젠가’를 기약하며 다시 몇년을 묵히게 될지도 모른다. 이런 나를 어찌할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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