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내가 입사 후 들어본 모든 말 중 가장 듣기 좋은 말이었다. 나의 정체성을 기쁘게 내보일 수 있는 말. 점심에 뭐 먹지 고민하는 직장인들에게 섣불리 떡볶이를 제안했다가는 그다지 즐기지도 않는데 네가 권했으니 거절할 수도 없고 오늘은 그냥 먹어줘야지 뭐. 하는 마음으로 떡볶이를 모욕하게 될 것 봐 같았다. 오늘은 평소 가보지 않았던 지하상가에서 점심을 먹자며 지갑을 들었다. 그곳에 즉석떡볶이 집이 있다는 사실을 진작 알고 있었지만 마치 ‘어머! 뭘 먹을지 고민하며 걸어가고 있었는데 마침 떡볶이 집이잖아!’ 하는 느낌으로 입구에 멈춰 섰다.
들어가 볼까요?
내가 물었다. 조마조마한 마음. 애매하게 웃는 걸 보니 불안해진다. 정말 좋아하지도 않는 걸 먹게 하는 걸까.
자주 가던 즉떡 집에서 최근 자취를 감춘 통오징어떡볶이가 그곳엔 있었다. 주문을 마치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넥타이부대까지 제법 보이는 걸로 봐서는 맛이 보장된 곳인가. 드디어 떡볶이 냄비가 우리 앞에 도착했다. 먼저 가위를 집어 들고 오징어를 자르는 그녀의 눈치를 살피게 된다. 좋아하지도 않는 걸 먹자고 해놓고 번거로운 일까지 시키는 거면 어쩌지. 하필 가위가 그녀 앞에 있었던 걸 어떡해. 가위질하던 그녀가 묻는다.
떡볶이 좋아하세요? 저는 엄청 좋아해요. 매일 먹을 수 있어요.
(맙소사! 이렇게 떡볶이 좋아하는 사람이 마침내 우리 사무실에 나타났어!) 저 진짜 진짜 좋아해요. 심지어 매일 먹기도 했어요.
그렇다. 나는 빵보다 조금 덜하게 떡볶이를 좋아해 왔다. 20세기와 21세기에 걸쳐 꾸준히 떡볶이를 즐겨왔고 시류에 따라 변하는 떡볶이 맛을 오롯이 탐닉했다. 조무래기 시절엔 ‘학교 끝나면 집으로 바로 와’라는 엄마 말을 매번 어기고 분식집을 발도장을 찍었다. 늘 양이 부족했다. 분식집 떡볶이는 나를 목마르게 했다. 100원어치로는 자리를 털고 나올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엄마 말을 무시한 것은 “학교 끝나면 집으로 바로 와”만이 아니었다. “친구 좀 그만 데려와.”도 자주 어겼다. 우리 집 어린이 손님용 음식은 주로 떡볶이였다. 엄마의 떡볶이는 다양하게 변신했는데 그중 최고는 달큼한 국물 베이스에 떡국 떡, 그 위에 별빛처럼 달라붙은 고춧가루 양념이 조화를 이룬 매코옴한 떡볶이였다. 프라이팬이 넘치게 만들어주는 건 가장 맘에 드는 부분이었다. 이건 가족용 떡볶이고 접대용 떡볶이는 달랐다.
우선 복화술로 “느, 애들 그그느면 드그브. (너, 애들 가고 나면 두고 봐.)”라는 세리머니를 거친 후에야 비로소 요리가 시작되고 잠시 후엔 상냥한 미소처럼 귀여운 깨를 솔솔 뿌린 떡볶이를 예쁜 접시에 담아 쟁반까지 받쳐주었다. 깨는 아무 때나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정성 들인 음식’ 인증과 같은 엄마만의 시그니처. 어린이 입맛에 맞춰 단맛을 강조한 떡볶이 때문에 “친구 좀 그만 데려와”는 불가능했다.
대학교 다닐 때 어느 일 년은 정말 떡볶이와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밥 대신 떡볶이를 매일 만들어 먹었다. 과거 팥빙수를 만들어먹고, 엄마가 숨겨둔 빵을 찾아 먹었듯 질리는 법 없이 매일 떡볶이를 만들었다.
나는 변함없이 떡볶이를 사랑했지만 인생의 풍파를 제법 겪은 30대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떡볶이를 추억 속에 박제해 버린채 그 맛을 찾지 않는 것 같았다. 적어도 우리 사무실에서는. 게다가 동생이 마저 즉떡을 즐기지 않아 나는 떡볶이 메이트에 목말라 있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떡볶이 좋아합니다.”라고 용기 있게 밝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이다.
아, 이렇게 우리가 서로 떡볶이를 좋아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떡볶이에 밥을 볶아먹고 나와서 커피를 입에 물고 바닐라 까눌레를 주머니에 가진 자. 나는 오늘 종로의 승리자. 나는 쉽게 질리지 않는 사람이다. 떡볶이와 빵, 초콜릿과 크림, 책 사 모으기와 어두운 조명, 비 오는 날과 농담을 평생 질리지 않고 즐기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에 드는 무언가를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를 자주 괴롭히는 이유가 된다. 요즘은 좋아하는 맛과 싫어하는 맛. 두 가지가 동시에 입속에 가득 차 있는 것만 같다. 마치 떡볶이와 오이를 동시에 씹는 기분.
새로운 떡볶이 메이트와 발견한 새로운 즉석떡볶이 맛 집은 나의 오랜 떡볶이 메이트와 다시 한번 와봐야겠다. 그땐 치즈 토핑 추가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