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아파서 이비인후과를 갔다. 이비인후과에 가면 젓가락 같은 꼬챙이로 콧구멍 안을 막 쑤셔대고 헛구역질이 나오도록 목구멍 안을 후벼댄다. 나름 아픔을 꽤 잘 참아내는 편인 나에게도 이건 상당히 괴로운 일이다. 그 와중에 - 젓가락 같은 꼬챙이로 내 콧구멍을 쑤셔대며 - 의사가 나에게 말한다. 괴로워하면 안 된다고, 산모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아기가 그대로 느끼니까 마음 편하게 가져야 한다고.
태교에 다른 것이 없고 엄마의 마음이 안정된 것이 최고라는 생각에 동의한다. 하지만 아기의 정서적 불/안정감을 엄마만이 오롯이 책임져야 한다는 데에 무게감도 느끼고 불편하기도 하다. 나만의 아기가 아닌데. 결국 아기를 물리적으로 품고 있는 쪽은 엄마니까 친밀함도, 아기를 생각하는 시간이나 마음도 더 클 수밖에 없다고는 생각한다. 이를테면, 뱃속에서 꼬물꼬물 하는 매 순간 생명의 경이를 느끼며 사랑이 넘쳐나는데 남편 쪽에서 어떻게 완전한 공감을 할 수 있을까. 나조차 임신 전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이 감정을 말이다. 아빠 쪽에서도 무관심한 건 아닐 테지만 주수가 지남에 따라 아이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지 궁금해하고 정보를 찾아보고 시키지도 않은 출산/육아 공부를 스스로 하는 건 자연스레 뱃속에 생명을 품은 엄마 쪽이다. 그렇다면 아빠의 역할은 어떤 것이 있을까?
돈만 벌어다 주는 게 아빠의 역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돈 많이 벌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좋은 직장, 좋은 직업을 가진 아빠로서 존재하는 것이 - 금수저까지 아니라면 은수저라도 - 그래서 평범한 소시민이 누릴 수 없는 더 편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이 아빠의 역할이라고.
돌아본다. 나는 어떤 아빠를 원했는가. 거짓말이라고 의심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정말 우리 아빠가 돈 많은 아빠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좋은 직업을 가진 아빠들을 보면 멋지다고 생각이 든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가장 부러워했던 친구 아빠는 다정다감하고 가정적인 아빠였다. 자상한 것이 정 안된다면, 쉽게 포기하지 않고 성실하고 근면한 아빠의 모습을 바랐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는 다가가기 편하고, 대화가 되고, 화내지 않는 아빠를 원했다. 부정적인 일을 겪었을 때 남 탓을 하기보다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했다. 본받을 수 있는 신앙적 믿음이 있는 아빠였으면 했다. 주식에 눈이 멀어서 이성을 잃는 아빠가 아니었으면 했다. 식당 종업원에게 화내지 않는 아빠였으면 했다.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지 않았으면 했고 분을 삭이지 못해 쌍욕을 하지 않는 아빠였으면 했다. 나에게 무섭고 두려운 존재가 아니었으면 했다. 오늘 점심으로 뭘 먹었고 집에 오는 길에 일어났던 일 등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빠였으면 했다. 내가 진학을 앞두고, 이직을 앞두고, 퇴사를 앞두고 하는 고민들을 털어놓을 수 있는 아빠, 내가 어떤 관심사를 가지고 살고 있는지 먼저 궁금해하는 아빠였으면 했다.
나도 사근사근한 딸이 아니다. 앞서 적은 내가 원하는/원하지 않는 아빠상을 말하는 것이 내 얼굴에 침 뱉기라는 것도 안다. 나도 보고 배운 게 그것밖에 없어서 다정하게 먼저 말 걸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의 많은 딸과 아들들이 '아빠' 역할이 처음인 수많은 아빠들의 서툰 모습에 깊은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 건 사실이다. 물론 이 모든 게 반대로 '엄마'인 경우도 있다.
나는 어떤 엄마가 될까? 나의 남편은 어떤 아빠가 될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도 좋고 편한 삶을 보장해주는 것도 좋지만 난 먼저 내가 갖지 못했던 사랑의 결핍을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드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