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었지만 언젠가부터 노래를 잘 듣지 않게 되었다. 그나마 정적이 싫어서 뭐라도 흘려보내고 싶을 땐, 가사 없는 연주곡을 틀어놓는다.
가장 열성으로 음악을 들었던 건 고등학생 때였다. 왠지 언니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외모의 H는 고1 때 잠시 나의 짝꿍이자 음악 듣는 재미를 알게 해 준 친구였다. 정확히 말하면 수업 시간에 이어폰을 교복 안쪽에 숨겨 몰래 음악 듣는 재미 말이다. 당시 그녀는 DJ DOC 앨범을 카세트테이프로 듣고 있었고, 몇 집인지는 모르겠지만 바운스 위드미 바운스 위드미 아무튼 그 노래가 담긴 앨범이었다. 짝꿍이지만 그다지 친하지 않았었던 우리는, 그녀가 한쪽 이어폰을 나에게 건네면서 수업 시간에 몰래 음악 듣는 사이가 되었다.
그 후로 어떻게 CD플레이어를 갖게 된 나는 이어폰을 달고 살았다. 특히 학교 가는 길 버스 안에서 노래를 들을 때면, 세상 모든 가사에 나를 이입하곤 했다. 지금도 가끔 그때 들었던 음악을 들으면 마음이 간질간질해지면서 여고생의 풋풋함, 알 수 없는 불완전한 감정들이 깨어나곤 한다.
그러나 고등학교 졸업 후의 나는 음악을 들을 때 가사에 집중하는 쪽은 아니었다. 가사가 좋아서 어떤 노래를 좋아하기보다는 그냥 들었을 때 기분 좋은 바이브를 뿜는 노래를 좋아하는 쪽이 월등히 많은 편이다. 그래도 30대로 넘어가면서부터는 가사 좋은 노래들을 다시 한번 들어보게 된다. 세상이 날 고단하게 만들 때 내 속을 대변해주는 가사. 누가 너무너무 좋을 때 내 마음을 읽어주는 가사. 때론, 어떤 감정이나 추억을 소환해내는 가사들. 그런 노래들은 흘려보내지 않고 플레이리스트에 꾹꾹 담아둔다. 언젠가는 꼭 필요할 것 같은 아이템을 쟁여 놓는 심정으로 말이다.
주로 가사가 있는 음악에 빠져있을 때는 드라마나 영화를 인상 깊게 본 후인 경우가 틀림없다. 사연이 있는 노래가 좋은 걸 테다. 며칠 전 나의 플레이리스트에 추가된 노래는 Bettye Swann의 'Then you can tell me good bye'이다. '빌어먹을 세상 따위'라는 영국 드라마에 나온 곡인데, 어둡고 불행하고 불안하지만 그래도 드라마를 보는 내내 결말이 좋길 바라는 내 마음이 담긴 것만 같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나는 서투르고 완전하지 않지만 그래도 너와 잘해보고 싶어'라는 마음을 전할 수 있을 것 같다.
육아라는 단순하지만 복작복작한 일상을 살고 있던 요즘, 가사가 입혀진 노래를 들으며 절절하게 사랑에 빠진 여자의 마음에 이입해본다. 간질간질하다. 오랜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