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장관(윌리엄 허트 분)이 추진한 슈퍼히어로 통제 법안 '소코비아 협정'에 반대하며 정부의 추적을 피해 은신하던 '어벤져스'의 멤버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스칼렛 요한슨 분)'는 정체불명의 빌런 태스크마스터의 공격을 받는다. 이후 어린 시절 자매처럼 지냈던 또 다른 위도우 옐레나 벨로바(플로렌스 퓨 분)와 만나 자신의 비밀스런 과거와 연결된 드레이코프 장군(레이 윈스턴 분)과 스파이 양성 기관 레드룸의 음모를 알게 된다.
나탸샤와 옐레나는 드레이코프 장군이 조종하는 태스크마스터와 새로운 위도우들에 맞서기 위해 과거 가족으로 위장한 바 있는 위도우 프로젝트의 개발자 멜리나 보스토코프(레이첼 와이즈 분)와 냉전 시간 러시아의 슈퍼솔져였던 레드 가디언 '알렉세이 쇼스타코프(데이비드 하버 분)'를 찾는다.
마블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슈퍼히어로 프랜차이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2008년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2019년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까지 23편의 영화와 드라마 <완다비전> <팔콘과 윈터 솔져> <로키: 시즌 1>을 내놓으며 21세기를 대표하는 문화 콘텐츠로 승승장구하는 중이다. 그런데 하나의 세계관을 확장하는 형태로 진행하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엔 미처 탐구하지 못한 측면들이 존재한다. 대표적인 게 블랙 위도우 '나타샤 로마노프'의 이야기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블랙 위도우는 <아이언 맨 2>(2010)를 시작으로 <어벤져스>(2012),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2014), <어벤져스: 에이지 오브 울트론>(2015),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2016),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2018),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까지 7편의 마블 작품에 출연했다. 그러나 과거의 행적이나 내면을 전면에 드러낸 적은 없다. <블랙 위도우>는 나타샤의 과거와 관련된 수많은 의문에 답하는 작품이다. 케빈 파이기 마블 스튜디오 대표는 <블랙 위도우>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캐릭터에 접근하는 영화"라 소개한다.
연출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촉망 받는 감독으로 <로어>(2012)로 해외 유수 영화제에서 상을 받으며 연출력을 인정받고 <베를린 신드롬>(2017)으로 선댄스 영화제, 베를린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이 맡았다. 블랙 위도우를 연기한 스칼렛 요한슨은 "케이트 쇼트랜드 감독은 캐릭터의 내면으로 들어가고자 했다"며 "10년 동안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고 또 그 캐릭터를 이렇게 파헤쳐보는 기회는 모든 배우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라고 설명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나타샤는 소울 스톤을 얻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던졌다. 캐릭터의 '이후'를 다룰 수 없는 상황이다. 당연히 제작진은 '이전'의 시간대로 눈길을 돌린다. <블랙 위도우>의 극 중 시간대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와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사이에 위치한다. 소코비아 협정으로 인해 어벤져스가 분열한 상태라 멤버들이 나타샤를 도와줄 수 없어 옐레나, 멜리나, 알렉세이의 도움을 받는다는 설정도 힘이 실린다.
<블랙 위도우>는 스파이 영화의 색채가 물씬 풍긴다. 나타샤가 고도로 훈련된 스파이이기도 하거니와 옐레나, 멜리나, 알렉세이가 각자의 역할을 나눠 팀으로 활약하는 모습이 마치 <미션 임파서블>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나타샤가 노트북으로 007 시리즈 중 하나인 <문레이커>(1979)를 보는 장면을 넣는 영화적 장난도 쳤다. 훈련된 여성 병기나 스파이가 주인공인 <니키타>(1990)나 <레드 스패로>(2018)의 요소도 엿보인다.
토르, 캡틴 아메리카, 헐크, 아이언맨은 초인적인 능력을 보여준다. 나타샤는 고도로 훈련되었지만, 결국은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블랙 위도우>의 액션은 총, 칼 같은 무기를 활용하거나 다양한 신체적 능력을 보여주는 리얼을 추구한다. 부다페스트 시내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은 CG 사용을 최대한 자제하고 실제 장갑차를 활용하여 촬영했다는 후문이다.
상대의 전투 방식을 복제하여 싸우는 빌런 태스크마스터의 능력도 인상적이다. 태스크마스터는 캡틴 아메리카, 호크 아이, 버키, 블랙 팬서 등의 전투 방식을 이용하여 나타샤와 겨룬다. 태스크마스터가 마치 거울처럼 나타샤를 그대로 따라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것은 나타샤가 드레이코프 장군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지금의 태스크마스터처럼 될 수 있었다는 점을 강하게 암시하는 대목이다. 또한, 나타샤가 과거에 저지른 행동에 대한 죄책감을 형상화한 것이기도 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줄곧 형제/자매, 부자/부녀, 유사 가족 등 가족 관계를 중요한 주제로 다뤘다. 레드 가디언으로 등장하는 데이빗 하버는 <블랙 위도우>가 "나탸샤의 끝나지 않은 임무"에 관한 것이면서 "한 번도 누군가에게 말해본 적이 없는 기이한 구성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라고 이야기한다.
나탸샤는 오래 전 임무를 위해 옐레나, 멜리나, 알렉세이와 가족 행세를 한 적이 있다. 어벤져스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던 것처럼 이들을 가족으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나타샤의 변화는 과거와 현재의 화해이고 가족, 나아가 인류를 위해 희생하는 이후 행적을 강화하는 전개다.
약물을 이용하여 위도우들을 조종하는 드레이코프 장군의 행동은 심리 조작을 통해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정서적 학대 행위인 '가스라이팅'을 떠올리게 한다. 나타샤의 자유 의지를 빼앗긴 위도우들을 해방 시키는 행동과 "모든 걸 스스로 결정해"란 대사는 <블랙 위도우>가 지금 시대의 유의미한 정치, 사회적 논평임을 선언한 것과 다름이 없다.
<블랙 위도우>는 원래 2020년 5월에 공개할 예정이었다가 코로나19 때문에 개봉이 미뤄지다 결국 미국에선 극장과 디즈니플러스에서 동시 공개하게 되었다. 스크린에서 만나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기다릴 만한 가치를 충분히 증명한다. 액션, 유머, 스파이, 가족, 여성 서사 등을 적절히 섞었다. 무엇보다 이미 접했던 이야기를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음 블랙 위도우로 유력한 옐레나의 비중을 높이기 위해 나타샤의 분량을 줄이는 실수와도 거리가 멀다.
캐릭터에 대한 존중을 갖춘 <블랙 위도우>. 그동안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에서 수고한 나타샤를 위한 근사한 작별 인사다. 그리고 새로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향한 포문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전설은 다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