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부터 1일이다. 잘 부탁해.
강릉에 도착했다. 가족과 함께였다.
아빠 지인께서 강릉에 호텔을 오픈하실 예정인데, 선(先) 오픈을 할 테니 가족과 함께 이용해 보고 시설, 서비스 등에 대한 피드백을 부탁한 아주 감사한 요청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주말이었기 때문에 강릉에서 일하고 있는 동생까지 합류한 가족여행이었다.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장기 외박을 하게 될 딸을 부모님께서 얼마나 걱정하실까 마음이 쓰였는데 가족여행 후 뜻밖의 배웅이 될 수 있겠다 싶었다. 그리고 사실, 짐을 챙기다 보니 24인치 캐리어가 2개나 나왔는데 엄청난 무게를 자랑하는 이 짐들을 나 홀로 낑낑 거리며 끌고 갔을 상상을 하니 끔찍했다.
2박 3일 동안 묵게 된 호텔은 오션뷰 그 자체였다. 모든 방에서 동해바다가 펼쳐졌다.
아침에는 눈으로 바다를 즐기고, 저녁에는 귀로 바다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또한 주문진과 강릉 사이에 위치해 있어 유명 관광지를 다니기에도 편한 곳이었다. 아직 주변이 깔끔하게 다듬어지지 않아(대부분 허허벌판이었다) 주변볼거리는 없었지만 꽤나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우리 가족에겐 강릉이 아빠의 고향이면서 동생의 일터이며, 동시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 곳이다. 일 년에 1~2번 정도 친할머니, 친할아버지의 묘를 찾아뵈어 기도를 올리고 ‘어머, 저 나무는 작년에 요만하더니, 잘 자랐네, 내년에 오면 더 커있겠다~’처럼 현지인(?) 같은 대화를 할 수 있는 곳이다. 또한 겨울을 제외하고 매번 들르는 곳으로 솔향수목원이 있다. 10여 년 전쯤, 강릉시내를 지나 산길 쪽으로 드라이브를 하다가 우연히 발견한 곳으로, 다양한 사철나무들과 계절에 맞는 제철꽃들, 각종 허브들이 있는 온실까지 꽤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이번에도 우리 가족은 솔향수목원에 있는 나무와 꽃들이 강릉의 혹독한 겨울을 잘 견뎠는지, 수목원 내에 계곡 속의 개구리알이 올해는 얼마나 모여있는지를 확인하는 우리만의 ‘의식’을 치렀다.
2박 3일의 짧은 가족여행을 끝으로, 아빠와 동생은 일터로 돌아갔다. 나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야호!
그리고 그날은 내가 예약한 숙소를 체크인하는 날로 엄마는 강릉에 남아 내가 짐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고 오후쯤에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다. 당신 딸이 지내게 될 곳을 보여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렌터카를 찾았다. 서류에 싸인을 하고 거금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니 차가 배정됐다. 설렜다.
이 차로 강릉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니라.
나는 운전을 좋아하는 편이다. 장거리, 단거리 가릴 것 없이.
면허를 따지 못하는 나이였을 적엔 조수석에 앉아서 아빠가 운전하는 걸 유심히 보곤 했다. 그리고 아빠한테 바깥에 펼쳐지는 도로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꼬치꼬치 질문을 해대곤 했다.
"아빠, 저 차는 왜 지금 가는 거야? 무슨 신호야? 그럼 우린 언제가?"
운전면허를 딸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서울에 모 운전면허학원을 갔는데, 수강생이 많아 무려 한 달 이상이 걸리는 스케줄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예상보다 오래 걸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등록 여부를 고민하던 중, 문득 동생이 강릉에서 면허를 취득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동생에게 학원 번호를 받아 연락 해보니 ‘수강생이 많지 않으니 어서 오십시오’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역시 강릉이 답이군.
그날로 짐을 싸서 강릉으로 갔다. 수강생이 많지 않다는 것은 거짓이었다. 내가 유일한 수강생이었다. 서울에서 필기시험까지는 통과했던 터라 빠르게 면허를 취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간 조수석에서의 ‘짬’ 덕분인지, 유일한 수강생인 나를 향한 강사님들의 열렬한 가르침 덕분인지, 높은 점수로 기능시험과 도로주행을 합격해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내가 운전할 때 감독역할을 해주었던 아빠 없이 나 홀로 운전하는 차에 처음 올라탄 엄마는 무척이나 긴장을 한 듯 싶었다. 높은 점수로 합격을 했고, 면허 취득 후 아빠와 운전전문강사님께 연수를 받은 나인데, 무슨 걱정을 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하며 예약한 숙소로 향했다.
동생집과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지상과 지하주차장을 갖춘 한 동짜리의 복도식 아파트였다. 외관은 오래된 듯했지만, 그 동네에서는 나름 신식인 아파트로 보였다. 집주인이 보여줬던 사진과 같이, 내부는 무척 깔끔했다. 지나치게 화려한 부분도 있어서 약간 적응이 필요하겠다..라는 생각이 잠시 들긴 했다. 집주인에게 입실했음을 알리고 숙박비 잔금을 보냄으로써 공식적으로 이곳은 나의 한 달 살기 보금자리가 되었다.
깐깐한 성향을 가진 엄마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계속해서 얼마 주고 예약을 했는지 묻는 엄마에게 대충 에둘러서 ‘다른데 보다는 조금 더 주긴 했지만 엄마가 생각하는 것만큼 많이 비싸진 않아’라는 알맹이 없는 말만 해주고는 더 자세히 물어볼세라 후다닥 짐을 풀었다.
짐정리를 마치고 점심식사를 하러 나왔다. 주변을 검색해 보니 깔끔한 한식당으로 ‘소도리’라는 곳이 나왔다. 시래기 된장 뚝배기, 돼지고기 백반등의 한식메뉴들이 정갈하게 나오는 곳이었다. 강원도 출신으로 시래기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빠와 언젠가 같이 와야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식사 후 경포해수욕장에서 산책을 했다. 엄마는 평소에 건강을 위해 모래, 흙이 깔려있는 곳에서는 거침없이 신발, 양말을 벗고 '맨발 걷기'를 하는데, 끝없이 펼쳐진 모래사장을 본 엄마는 어김없이 건강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한낮의 모래사장이 뜨거운지 파도치는 물가 근처로 옮겨 걸었다.
기차시간이 다되어서 역에 데려다주는데, 엄마는 마지막 당부의 말을 했다.
"밤에 너무 늦게 돌아다니지 말고, 배달음식 너무 많이 시켜 먹지 말고 밥 해 먹고, 항상 운전 조심하고, 집 문단속 잘하고, 마지막으로 재밌게 놀다 와, 근데 진짜 혼자 안 심심하겠니?, 피여나(친한 친구 별칭) 오라구 해서 같이 놀아"
아마 엄마는 내가 장기외박을 하는 기간 내내 위에 했던 당부들을 곱씹어 걱정할 셈인 듯했다.
아무 일 없이 잘 지내다 돌아갈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강릉에서 혼자 지내는 동생에게 보호자가 생긴 것이라고 생각하라는 큰 딸의 말을 듣고 돌아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이상하게 조금 찡했다. 많이는 아니고 조금. 부모님의 뒷모습을 보는 건 이유 없이 마음이 싱숭생숭 해진다.
엄마를 배웅하고 나니, 저녁시간이었다. 퇴근하는 동생을 데리러 갔다. 내가 지낼 숙소를 궁금해해서 같이 저녁을 먹고 손님방에서 재울 생각이었다.
강릉에서 학교를 다니며 6년을 보내고 현재 모교 병원에서 인턴쉽과정 중에 있는 동생은 현지인이 아는 맛집들을 많이 알고 있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강릉에 올 때마다 관광객이 즐비한 맛집보다는 동네맛집들을 다녔다. 누가 강릉에서 인도카레를 먹고, 훈제오리를 먹으러 다닐까.
그날도 동생이 알아낸 스페인음식전문점을 갔다. '라꼬시나바이이성용'이라는 사장님 이름이 가게이름에 박혀있는 자부심 넘치는 곳이었다. 음식도 맛있었지만 아직 가보진 못한 나라인 스페인을 간접체험할 수 있는 재밌는 곳이었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동생의 짐을 챙기러 잠깐 동생집을 들렀다. 동생은 자신의 짐을 챙기다가 문득 나에게 필요한 것이 있냐고 물었다. 서울에서 짐을 쌀 때 한 달의 기간 동안 쓰기엔 애매한 화장품 같은 용량이 있는 것들은 가서 새로 사자는 마음이었기 때문에, 지금 당장 필요한 것들은 내일이나 모레 사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동생은 일단 자신에게 여유가 있는 것들이 있으니 챙겨주겠다고 했다. 렌즈세척액, 라면, 엄마가 보내줬던 반찬 등을 쇼핑백에 챙겨주었다.
언젠가 동생이 서울 본가로 왔다가 돌아갈 때면 자취생에게 왠지 뭐라도 들려 보내야 할 것 같아 화장대, 서랍을 뒤져서 여유 있게 사뒀던 렌즈세척액, 화장솜, 마스크팩 등 당장 내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챙겨주곤 했다. '네가 빈손으로 가는 것이 마음이 쓰여'라고 구구절절 설명할 만큼 친절한 언니는 아니라서 그저 "가져가"라며 동생 캐리어에 툭툭 던져주는 편이었다. 퉁명스럽게 던져 줌에도 불구하고 동생은 "오와, 땡큐땡큐"라고 과하게 리액션을 하며 마치 내가 대단한 것을 주는 것처럼 고마워해서 머쓱해지곤 했다.
그런데 내가 이런 챙김을 받으려니 어색했다.
그리고 동생이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모습이 고마웠다.
이렇게 함으로서 동생이 나의 한 달 살기를 응원해주고 있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어쨌든 동생이 챙겨주는 짐을 싣고 '내 집'으로 향했다. 집이 지나치게 화사하다고 말하는 동생도 나름 집이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여기저기 쏘다녔던 나도, 하루종일 일했던 동생도 피곤해 씻고 각자의 방에서 잠들기로 했다. 잠자리가 낯설어인지, 마음이 설레서인지 잠이 쉽게 들지 않았지만 '내일은 뭐할까..'라고 생각하면서 잠드는 것으로 나의 한 달 살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오늘부터 1일이다. 잘 부탁해 강릉.
오늘의 맛집 - 소도리
강릉맛집 주문진맛집 소돌맛집 한식맛집 "소도리"님(@sodori40)의 Instagram 계정
*한식 한상이 정갈하고 깔끔하게 나오는 곳이다. 식당 한편엔 기념품샵이 있어 식사 후 구경해 보는 것을 추천한다.
*가게 앞 주차장이 있으나 협소할 경우 도보 3분의 소돌항공영주차장이 있다.
*메뉴 : 시래기된장뚝배기, 동치미비빔밥, 돼지불고기정식 등
*1,3번째 주 수요일 휴무
오늘의 명소 - 솔향수목원
*산길, 포장길, 잔디밭, 계곡, 온실화원, 놀이터 등의 다양한 놀거리, 볼거리가 있는 곳이다. 도시락이나 디저트를 준비해 경치 좋은 곳에 자리 잡아 시간을 보내는 것을 추천한다.
*관람 후 10분 거리에 있는 '테라로사 커피공장 강릉본점'을 들르는 것도 추천한다.
*매주 월요일 휴원(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다음 날 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