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기다려 강릉, 잠깐 일 보러 서울 좀 다녀올게
본격적인 강릉 살기가 시작되었다.
부모님과 함께 살았었던 내겐 본격적인 ‘자유’와 '편함'이 느껴지는 하루하루였다. 잠귀가 밝은 탓에 늦잠을 자도 되는 주말이라도 문 밖에서 느껴지는 동거인(부모님)의 인기척이 반갑지 않을 때도 있었기 때문이다.
알람도 맞추지 않고, 그저 눈이 떠질 때 눈을 떠도 되는 그 기분.
째진다. 째져.
퇴사를 고민하던 때, 세상의 모든 것들이 나를 향한 부정적인 자극으로 느껴지던 그때와 달리 강릉에서는 온 세상이 날 가만~히 두는 듯했다.
하지만 이런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퇴사하기 한 달 전쯤이었다.
내 인생의 끝을 상상했을 때, 먼 훗날에도 나의 곁에 있을 것 같은 친구가 결혼을 한다며 청첩장을 주었다. 결혼식 날짜야 이미 알고 있던 터였지만 청첩장을 받으니 새삼스러웠다. 진짜 결혼을 하는구나, 내 친구가 유부녀가 된다니... 우린 아직 고등학교 그 시절에 머무는 듯했는데, 시간이 가고 있긴 하는구나...라는 철없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1학년때 같은 반 친구로 처음 만나, 서로의 성향이 잘 맞다는 것을 알게 되어 많은 시간을 함께 했고, 고등학교 3학년까지 같은 반이 되어 고3이라는 힘든 시간을 함께 으쌰으쌰 했던 친구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후 각자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각박한 사회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의 힘들고 지친 마음들을 나누고 지지해 주며 성장해가고 있는 우리였다.
그래서인지 언젠가 이 친구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내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곤 했다. 어떻게 하면 이 친구에게 나의 온 마음이 담긴 축하와 그간의 고마움을 전달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 끝에, 청첩장을 받는 그날, 고민을 끝낼 수 있었다.
워낙 가까이 지내던 친구라 평소에 굳이 말하지 않았던 모든 고마웠던 것들과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친구에게 축복의 말을 전할 수 있는 ‘축사’를 하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을 꺼려하던 나에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있었는지, 청첩장을 주는 친구에게 단숨에 “친구야, 내가 축사해 줘도 될까?”라고 말했다. 친구는 눈이 똥그래지면서 “진짜???!, 나야 너무 좋지, 고마워, 안 그래도 누구한테 부탁을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라고 했다.
그 뒤로는 나에게도 인생 첫 퇴사라는 핫이슈가 있었기에, ‘축사’는 잠시 잊혀 있었었다.
결혼식 날짜는 공교롭게도 내가 강릉 한 달 살기를 시작한 날로부터 딱 일주일이 되는 날이었다. 얽매여있던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을 위한 한 달 살기가 시작되자마자 나에게 ‘축사’라는 무겁지만 영광스러운 과업이 주어졌다.
<친구의 결혼식 D-5>
기한이 있는 보고서, 과제들과는 느낌이 달랐다. 전문적 지식을 활용하는 문서가 아닌 그 친구와의 기억, 추억 등을 더듬어야 했고, 이러한 우리들의 이야기를 결혼식의 하객으로 오신 많은 분들 앞에서 나누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에게 썼던 진심 어린 편지들이 몇 통이던가. 지금 나에게 주어진 한 통의 편지를 쓰지 못할 걱정은 잠시 접어두고, 강릉의 푸른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여유를 부리느라 이틀이 흘렀다.
<친구의 결혼식 D-3>
도저히 써내려 가지지 않았다. 대단한 말로 찐한 감동을 선사하겠어!라는 포부 넘치던 나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칸을 채우기 급급해 뻔하디 뻔한 말들을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아냐 아냐, 이건 너무 뻔하다. 안 하느니만 못하는 말들은 하지 말자. 아니? 아무리 뻔한 말이라도 남들 다하는 말들은 해야 하지 않겠어?라는 온갖 양가감정(*두 가지의 상호대립되거나 상호 모순되는 감정이 공존하는 상태)이 온 머릿속을 헤집었다.
망했다. 괜히 나댔구나 싶었다.
<결혼식 D-1>
하늘이 두쪽이 나도 오늘은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며칠 내내 허공에 대고 고민만 하다, 고등학교 때 논술을 준비하던 느낌으로 기-승-전-결에 맞춰서 쓰다 보니 나름 써내려 져 가고 있었다. 이 추억을 먼저 쓸까, 저 에피소드를 먼저 쓸까, 치열하게 고민하면서 써 내려가니, 어느덧 결말에 다 다랐다. 결혼식 당일에 서울로 가는 건 너무 촉박할 것 같아, 전날 서울 본가로 올라가기로 했었다. 렌트카를 강릉역에 세우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기다려 강릉, 잠깐 일 보러 서울 좀 다녀올게.
<결혼식 D-day>
긴장한 탓인지, 서두르다 보니 신부보다 먼저 도착해 버린 나는 앞 순서 커플의 하객들과 섞인 채로 서있으면서, 내가 쓴 원고를 읽어보고 있었다. 그러다 신랑신부와 가족들이 도착해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해내기 시작했고 나도 결혼식장 직원을 따라 내가 축사를 하게 될 순서와 자리 등을 안내받고 있을 때, 같이 초대받았던 친구가 도착했다. 도착한 친구를 붙들고 원고를 보여줬다.
"어때? 혹시 너무 건조하거나 식상해?"
"응? 아니? 너 이거 읽다가 울 거 같은데?"
"엥? 진짜? 아닌데? 여기서 울 것 같은 포인트가 어딨어"
"콕 집어 말하긴 어렵지만.. 하여튼 울 것 같아"
음... 몇 번을 다시 봐도 울 것 같은 포인트가 전혀 없는데...
그러다 신랑과 신부의 차분한 걸음으로 결혼식이 시작되었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나이가 결혼적령기를 향해 가면서 결혼식을 몇 번 다녀보니, 아무리 틀에 박힌 순서와 꽃장식, 조명 등이라도 결혼식을 준비한 두 사람의 평소 성격이나 성향이 녹아져 있다는 것을 느끼곤 했다.
이번에도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 차분하고 조용한 성격이고, 화려한 것보다 무난한 것을 좋아했던 친구였기 때문에, 결혼식은 조용하고 차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도 튀지 말아야지. 물 흐르듯 하리라.
드디어 신부 측 축사 순서가 되었다.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정해진 자리에 섰다. 하객을 향해 준비한 깔끔한 인사말을 전하고 나서 신부 쪽을 향해 섰다. 약간의 민망함으로 서로를 향해 웃고, 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나의 00아"
하는 순간, 그냥 목구멍이 턱 하고 막혔다. 전혀 생각하지도 못한 부분에서 전혀 생각하지 못한 감정이 울컥 튀어나왔다. 망했다.. 하면서 친구를 바라보니 울컥한 나를 보며 친구도 울컥해 입을 앙 다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도저히 다음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직원분이 휴지를 가져다주고, 사회자분은 시작하자마자 울고 있는 나를 향해 응원과 지지를 보내주고 있었다.
어느 정도 진정이 되어 읽기 시작했다. 중간중간 울컥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천천히 내 마음을 전했다.
축사가 끝난 뒤 예정되었던 순서가 마무리되고 같이 초대받은 친구와 밥을 먹고 있을 때 신부 어머님께서 오셔서 축사가 너무 감동이었고, 자신도 울고 싶었는데 꾹, 정말 꾹, 참느라 혼이 났다고 하셨다. 잔잔했던 결혼식에 감동이 더해져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덧붙이셨다.
이렇게 무사히 축사를 마치고 그날로 나는 나의 평화와 자유가 있는 강릉으로 다시 떠났다.
이제 진짜 휴식이다!
오늘의 맛집 - 동해일미
*간장게장 정식이라는 단일메뉴만 있는 곳으로 암꽃게, 숫꽃게와 크기별로 가격이 상이하다. 간장게장과 더불어 여러 가지 반찬이 나오는데, 그중 '오징어볶음'이 제2의 밥도둑이다.
*주차는 가게 앞 은행주차장(유료)에 할 수 있고, 음식계산 시 주차권 대신, 해당가격을 제하고 계산해 주신다.
*매주 일요일은 휴무이고, 토요일에도 재료소진으로 저녁식사는 어려울 수 있다.
오늘의 명소 - 경포호수광장
경포호수공원 검색 - 네이버 지도 (naver.com)
*스카이베이 호텔이 보이는 쪽에 돗자리를 펴고 준비한 커피와 디저트를 먹기 좋은 곳. 낮에는 나무아래에 자리를 잡고, 해가 떨어진 후에는 잔디에 자리를 잡아 노을을 바라보는 것도 좋다.
강릉시 교동에 위치한 '프랑'이라는 카페에서 사 온 디저트. '밀크티' 맛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