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에 대한 비움
우리 부부는 원가족의 특징이나 성향이 너무 달랐다.
마치 남과 북이 하나로 합쳐지기 어려운 거리만큼의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대가족의 가족 구성원들과 함께 넘을 수 없는 끈끈한 유대관계를 가진 종갓집의 분위기와 달리 짝꿍 원가족의 분위기는 완전 반대였다. 가족 인원수부터 적었고 만남 또한 굉장히 소극적이었으며 관계의 유착관계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해 보이는 간극이 존재했다. 결혼을 준비하면서 인사를 갔는데 두 분의 가족이 계셨지만 각자 따로 만났고 함께 인사도 제때 나누지 않았다. 결혼하고 나서야 이유를 알게 되었지만 마음이 좋지 않았다.
반면 우리 가족은 새 식구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돌아가며 많은 가족들과의 만남을 자주 가졌다. 짝꿍과의 즐거운 식사를 함께 하고 싶은 가족들과의 만남이 잦았고 피곤했지만 한 번은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라고 생각해서 짝꿍에게 양해를 구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렇게 결혼식을 하고 나서 이제 본격적인 결혼생활의 서막이 올랐다.
부부도 다를 수 있기에 크게 문제 되는 부분은 없었다. 서로가 선택할 수 없었던 만남과의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해야 할 부분은 있었지만 그 이면엔 각자의 가족을 존중하는 마음은 우선되었다. 서로의 특징들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였고 가까워지려 크고 작은 이벤트들을 만들며 사이를 좁혀갔다. 그럼에도 원가족의 특징은 각자가 더 잘 알고 있을 테니 사이가 어긋나지 않도록 각자의 자리에서 중재자의 역할은 필수였다.
그 노력의 중심에는 짝꿍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힘들면서도 짠한 마음이 크다.
원가족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지만 심리적 가장의 역할을 하며 지내왔던 그가 자신의 가정을 이루면서 그 가족과의 분리되는 과정에서 나와의 관계까지 신경 써야 하는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어른을 존중하고 공경하는 본받을만한 마음 씀은 남편이라서가 아니라 한 사람으로서 매우 존경할만한 장점이었다. 그렇기에 나도 노력을 하고 싶었다. 시댁에서 며느리나 시누이로서 해야 할 역할만큼은 충실해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종갓집에서 보고 듣고 살아온 시간을 무시할 수 없었기에 나 또한 어렵지 않게 짝꿍의 원가족과 친밀함을 쌓아가고 있었던 시기였다.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 친밀함을 쌓을 수 있도록 짝꿍이 보호막이자 방패가 되어주며 원가족 사이의 균형을 맞춰주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사고가 나던 전 주말은 우리 부부에게 큰 행사가 있었다.
양가 원가족을 모시고 복날을 맞아 집에서 식사 대접을 성대하게 치렀다.
이 날 아빠는 진심으로 사위에게 받은 진수성찬에 대한 여운을 두고두고 회자하실 만큼 감동을 받으셨던 모양이다. 사고가 나던 날 또한 퇴근 후 우리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이 상황이 보여줄 날 것에 대한 만남이 어떤 상황을 만들어줄지 말이다. 모를 수밖에,
사고 직후에는 짝꿍을 살려야 했기에 환자를 돌보는 것에 온 에너지를 쏟았다.
24시간이 모자랄 돌봄의 시간.
그 깊고 어두웠던 시간을 우린 서로를 위로할 틈을 만들지 못하고 철저한 타인으로서 각자를 챙겨야 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짝꿍이 애썼던 보호막과 방패막의 경계는 흐려졌고 균형 또한 무너졌다. 시어머니와 짝꿍의 누나는 원가족이고 나는 철저한 타인이다. 가시적으로 두 분 사이도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핏줄이자 모녀이기에 그 사이에서 남편 자리가 없는 며느리의 존재는 희미해져 갔다.
게다가 원가족의 특성도 너무 다른 그들과 섞이기란 쉽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나를 구해야 했고, 지켜야 했다. 드라마에서 보던 극단적인 시댁과의 균열과 무너짐은 아니었지만, 상황에 계속 변하고 있었기에 서로에게 요구하는 입장과 역할이 달라진 것이다.
가장 큰 슬픔이자 아픔, 그리고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는 흔적이 있다.
엄마를 하늘나라에 보내고 다시 짝꿍을 돌보러 병원에 들어올 자신이 없었다.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고 엄마의 마지막을 함께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일상을 살아낼 용기가 나지 않았어 쓰나미처럼 몰려드는 감정의 소용돌이 안에서 갈 길을 잃었다.
엄마와 남편. 세상에 유일한 내 편들 이 한꺼번에 부재를 맞이했다.
그런 상황에서 시댁 식구들은 그 어떤 위로나 배려는 없었다. 내가 표현했으면 달라졌을까?
처음엔 그들이 원망스러웠지만 기본값부터 다른 가족과의 관계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은 내 마음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하게 짝꿍의 원가족을 이해하는 범위를 넘어 한 개인의 전체적인 삶까지 이해하며 그 사이에서 끊어지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상황까지 만들게 되었다. 그때 당시, 나는 짝꿍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없었기에
스스로를 갈아 넣고 구석으로 몰아넣으며 억지로 이해하려고 애를 썼다. 내가 살기 위한 방안이었다.
사실 얼마 전까지도 그 애씀이 굉장한 스트레스가 되었었다.
나를 괴롭히던 내면의 큰 목소리들이 자리 잡고 있다.
환청처럼 들리던 소리들의 크기만큼 알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나를 갉아먹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만든 것이지 그들이 대놓고 나에게 주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고 나서야 삶의 포인트를
전화할 수가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짝꿍의 빈자리는 채워질 리가 없었고, 그 자리와 역할까지 하면서 그들과의 유대관계를 고민하던 시간을 지나고 있다. 최고조의 극단적 감정을 찍고 현실을 바로보고서야 상황 파악이 되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현재 나는 짝꿍을 위해서만 그 역할을 하려고 노력 중이다.
착한 며느리나 착한 시누이는 될 수 없음을 나 스스로에게 인정하며 선언했고, 그들은 요구한 적 없는 관계를 위한 어떠한 행위들은 하지 않는다. 인류애를 발휘하거나 내 마음이 끌리는 어떤 날은 서로에 대한 연민으로
좁힌 거리 안에서 간병인으로서의 생존을 위한 단결하는 마음을 보이기도 한다.
관계가 중요한 나로서는 이 상황이 낯설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무너져가는 나를 위해 철저히 비우고 경계
해야 하는 마음인 것을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날 것들에 대한 만남을 하는 이유와 짝꿍의 옆 자리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아직은 짝꿍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과 그의 회복을 돕고 싶다는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언제 이 마음들이 변하게 될지, 지속될지는 단언하지 않는다.
타인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말은 더 아니다.
이 모든 과정들은 내가 선택한 여정이고 그 안에서 생기는 상황들에 대해서는 기꺼이 잘 받아들이려고 한다.
나는 지금 나를 위한 최선을 다 하고 있는 사랑의 마음으로 매 순간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