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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CA May 01. 2020

바람이 분다

드라마 '밀회'

긴 시간을 함께 한 사람과 인연이 끊어지고 난 뒤 속이 꽤나 쓰렸던 시간을 보냈었다. 머릿속이 시끄럽던 겨울밤, 갑자기 드라마 ‘밀회’ 마지막 회 '오혜원(김희애)'의 최종변론 첫 문장이 스쳤다.



"저는 지금 제 자신에게만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 문장이 떠오르기 전까지 내 머릿속은 끊어진 상대방과의 온갖 에피소드로, 마치 열흘 넘게 청소를 하지 않은 침대 밑에서 발견된 머리카락 뭉치처럼 뒤엉켜있었다.

마냥 괜찮다고 하지 말걸, 그때 그 말은 하지 말걸, 상대가 나에게 준 상처를 괜히 다시 건드리고, 나의 잘못과 상대의 잘못을 머릿속에서 쭈우욱 리스트업 하느라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 지금 이걸 글로 나열하는 중에도 정말 부질없단 생각이 열다섯 번쯤 스쳐가네)




영화 러닝타임 길이에 길들여져 있는 나는 통상 16부작 이상씩 연속되는 한국 TV 드라마 호흡을 버거워하는 편이다. 대부분 1화를 보다가 흥미를 찾지 못하고 시청 중단. 개연성이 없거나 너무 한쪽으로 과한 억지스러운 캐릭터가 등장하면 금방 흥미를 잃는 편이라, 모처럼 취향에 맞는 드라마를 만나게 되어도 4회 정도에서 고비를 맞이하게 된다.

지난 10년간, 내가 전 회차를 다 시청한 (한국)드라마는 열 편쯤 되려나.


비밀의 숲
라이브
디어 마이 프렌즈
미생
스카이캐슬(마지막 회를 보고 난 뒤, 전편 관람한 것을 진심으로 후회했었다)
풍문으로 들었소
아내의 자격
밀회

이 정도가 될 것 같다.
이 중에서 맨 아래 세편은 같은 연출(안판석)과 작가(정성주) 콤비가 만든 드라마였고, 나의 취향엔 이 두 분 작품이 대부분 들어맞았다.


상류사회의 일원으로 살고 싶단 욕망 하나만으로 혜원은 마흔 살까지 ‘서한예술재단’ 회장 집안을 위한 충견으로 살아왔다. 상류사회에 속한 충견이 그저 본인 인생이라고 받아들인 지 이미 오래이던 어느 날, 가난하고 전혀 어색함이 없는 스무 살 피아노 천재 이선재와 만나게 된다.


혜원은 선재의 천재성에 감탄하기 벅찬데,

선재는 혜원을 보자마자 '사랑'으로 돌진해온다.

혜원은 선재의 순수하고 건강한 열정을 보며 점차 자기 자신의 더러운 현재가 버거워진다.


혜원이 몸담고 있던 세계는 '돈 전쟁'이 진행 중. 이미 갖고 있는 돈은 넘치지만 그것만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서로 가짜 웃음을 방패로 각자 자기 주머니에 돈을 주워 담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부도덕과 불법이란 단어의 의미는 이미 그들의 세상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의 중간책인 혜원의 삶은 '윗대가리' 욕심의 파도로 인해 매 순간이 바쁘다.



각자 준비해온 웃음으로 무장하고 마작 게임을 하는 그들만의 리그



나는 별것 아닌 일에도 마치 나 아니면 그걸 행할 사람이 없는 것처럼 그 상대의 매사에 최선을 다 해왔다. 그의 일이 잘되거나 말거나 나한테 큰 보람이나 손해도 없었는데, 그냥 그 최선이 내 인생을 위한 당연한 노력이라고 착각을 했다.

사실 인연을 끊기 2-3년 전부터 그의 부족한 젠더 감수성과 은근히 행하는 폭력 때문에 그 관계에 대한 고민이 종종 있었는데, 미련하게도 난 그때마다 문제를 이겨내기 위해 서로 대화를 통해 개선해보는 것이 최선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심지어 상대가 싫어질 때마다 오히려 이 과정을 견뎌내어야 이 관계가 완성이라도 되는 듯 스스로를 독려했다. 불필요한 헛짓거리를 다양하게 하며 많은 불쾌함을 그야말로 버텼다니... 그때의 나는 나에게 전혀 집중하지 않았다.



내 주변이 받는 '특급칭찬'이 나의 몫과 마찬가지라고 우겼던 시간, 안녕.


혜원은 사랑하는 선재를 자기가 있는 곳으로 데려오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본인이 선재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을 택한다. 낡은 상가건물 위에 30년은 족히 됐을 세월의 짐이 쌓여있는 선재의 집. 혜원 휴대전화에 저장되어 있는 선재 전화번호의 명칭은 '집'. 남루하고 허름하지만 선재의 집이 유일하게 혜원의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공간이 되었다.



얼마 전에 10여년 만에 만나는 한 친구와 술을 한잔 했다. 나보다 10살쯤 어린 그 친구는 나와 만났던 당시 스무 살이었는데, 그때 내가 본인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쳤다며 오랜만에 만난 나에게 과분한 찬사를 전했다. 민망하면서도 기분 좋은 경험이었지만, 사실 그 친구의 말은 다소 무리가 있다. 내가 아무리 그 친구에게 (소소한) 도움을 줬다한들, 그 친구의 마음이 어떻게 소화시켰느냐에 따라 결론은 확연히 달라졌을 테니까.



“젊은 친구들에게, 악기라는 건 내가 소리를 내주기 전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사람끼리도 그렇잖아? 마음이 실리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것도 그냥 물건이야. 마찬가지로 아무리 싸구려라도 나를 표현하고 담아낼 여지는 있어. 지금 당장 너한테 있는 걸 진심을 다해서 아끼고 사랑해주길 바라”

- 밀회에서 싸구려 악기 때문에 속물 교수들에게 내쳐져 퇴학을 압둔 학생들에게 전하는 김은수 교수의 응원 메시지



쥐 파먹은 듯 머리가 잘려 미용팀에서 들렀다 선재를 만나는 혜원


혜원은 최종변론에서 본인이 앉아야 하는 자리를 깨끗하게 마련해주기 위해 선재가 열심히 걸레질을 하던 순간을 본인 ‘인생의 명장면’으로 꼽았다. 누군가 나를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며, 그간 본인이 본인을 학대하고 스스로 불쌍하게 만들어왔단 걸 마주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로 인해 기억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누군가에게 상처와 절망을 줬을 테니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간에 승복하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해 겨울 이후 나는 그 상대와 마주칠 가능성이 있는 장소에 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 않으려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으니 갈 일이 없어졌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겠다. 나에게 집중하는 것에 성공하고 나니 어느새 계절은 여름이 되어 있었다.


혜원이 담장을 잡고 있는 저 때도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온 듯


더 이상 머릿속에 그 상대가 자주 등장하지 않는 것이 문뜩 떠오른 초여름날, 나는 부러 그와 마주칠 가능성이 농후한 거리로 밤 산책을 다녀왔다. 그리고 그 거리 한가운데 큰 나무 아래에서 잠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순간 나뭇잎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불며 내 입에는 미소가 피었다.

근래 내 인생의 명장면은 바로 그때.




바람이 분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는 이렇게 달라져 있다





밀회,  2014


드라마/멜로

(연출) 안판석

(극본) 정성주

(출연) 김희애, 유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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