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SICA Sep 02. 2020

If you want me satisfy me

영화 원스 Once

해를 넘기고 나면 나이 앞 자릿수가 빼박 3으로 바뀌게 되는 크리스마스이브날 저녁, 청계산으로 향했다. 나를 포함 당시 가장 가깝던 넷이 모여 각자 남기고 싶은 아이템을 가져와 청계산에 타임캡슐을 함께 묻기로 했다. 이태원에서 만나 어떤 것을 가져왔는지 공유하고, 폴라로이드 사진을 함께 찍어 땅에 묻을 통에 모아 담았다. 언제 오픈할지는 미정. 청계산에 도착해서 조금 올라가 마땅한 자리를 골라 호달달 떨며 작은 삽으로 구멍을 팠다. 추위에 훌쩍, 별것 아닌 것에 낄낄거리며 타임캡슐을 묻고 인근의 식당에 가서 오리고기를 냠냠 먹었다.


청계산으로 향하기 몇 달 전, 가을.

나는 그때까지 혼자 영화를 볼 기회가 없었는데,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당시 업무로 자주 방문하던 동숭아트센터 하이퍼텍나다에 '원스' 포스터가 걸린 것을 보고 이거다 싶어 바로 마음을 정했다. 경험이 쌓이고 나면 별 것 아니지만 '처음'은 역시 어색했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데 괜히 이것저것 의식이 되어 쓸데없이 생경한 티를 잔뜩 내며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큰돈을 들이지 못한 티가 역력한 영화는 매끄럽지 않았지만.. 글렌 한사드의 호소력 짙은 목소리 때문인지, 옆에 서면 풋풋한 향까지 날 것 같은 마르게타 이글로바의 눈매 때문인지, 존 카니 감독의 연출력 덕인지, 금세 나는 그들과 함께 더블린 광장에 서있었다.


그와 그녀, 마주하다


밤마다 몸 가득 차있는 뜨거움을 노래로 쏟아내는 그 앞에, 아직 사람에 대한 배려를 미처 다 배우지 못한 것 같은 그녀가 마주 선다. 배려는 부족해도 선함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그녀의 등장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은 그. 특별히 매력적일 것도 없는 질문을 이어가는 그녀가 조금은 귀찮아 툴툴거려도 그녀는 그녀의 속도대로 직진해온다. 고장 난 청소기를 굳이 굳이 들고 찾아온 그녀에게, 그는 평범한 남자의 속내를 부러 꺼내 상처를 준다.


그가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둘은 음악을 통해 조금씩 가까워진다. 그가 그녀에게 비어있는 곡을 건넨다.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주기로 한 그녀. 퉁탁퉁탁탁만 나오는 반주에 어떤 노래가 완성되려나. 그녀의 어느 밤, 슈퍼마켓 쇼핑과 함께 곡은 완성되는데, 밤길에 조명 하나 없이 걸어오는 그녀를 담은 영화는 아예 깜깜해져 버리기도 해서 유독 더 노래에 집중이 더 잘 되었다.


Are you really sure that you'd believe me when others say I lie
I wonder if you could ever despise me
when you know I really try to be a better one to satisfy you
For your everything to me and I'll do what you ask me
if you'll let me be free

If you want me satisfy me
If you want me satisfy me
If you want me satisfy me

   

그녀의 마음이 그대로 옮겨진 듯한 가사로 볼품없던 곡은 촘촘하게 아름다워졌다. 영화에 나오는 모든 곡이 훌륭하지만, 대히트를 친 Falling Slowly보다 내 마음엔 바로 이곡 If you want me가 깊이 들어앉았다.


비록 반짝이지 않더라도, 그녀의 오늘


돌아보면 20대의 나는 몹시 어두웠던 것 같다. (분명한 원인이 있긴 했지만) 당시의 나는 내가 그 정도로 어둡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늘 이 정도로 버티는 나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곤 했다. 아마 그 착각이 오히려 20대의 나를 버티게 해 준 힘이 되어 준 것일 수도 있겠다. 늘 조금씩 아이러니한 인생.


2019년, 청계산에 묻은 타임캡슐에 내가 넣은 것은 If you want me(음악이 담긴 CD와 가사)였다.

묘하게도 타임캡슐을 같이 묻은 3명과는 모조리 연이 끊어졌다. 가족보다 더 가깝다고 생각하며 10여 년 동안 크고 작은 일을 함께 했는데, 비눗방울이 터지듯 한순간에 터져버리고 말았다. 처음에 연이 끊긴 1명에겐 구질구질한 미련이 3년 정도 따라붙었었는데, 마지막으로 연이 끊긴 1인과는 거짓말처럼 미련조차 생기지 않았다. 오해를 오해로 인정하지 못하는 그와 명백히 오해지만 빌미를 준 것이 사실이어서 더 이상 실랑이를 하고 싶지 않은 나는 30분 정도의 시간을 끝으로 끊어져버리고 말았다. 비록 마지막 그와 마주친 눈이 반년 정도 가끔씩 마음을 때렸지만, 어느 순간 이후부터 그저 나의 젊음을 함께 했던 친구들을 잃게 되어 종종 아쉬울 뿐. 그들로 인해 누린 기쁨과 즐거움, 덕분에 포기했던 나의 에너지, 서로 주고받았을 상처들이 뒤엉켜 함께 마무리한 그 10여 년의 '시간'도 청계산 어느 곳 타임캡슐에 묻어두기로 했다.


그의 내일을 위해, 기꺼이

 

그녀 덕분에 용기를 낸 그는 오랫동안 마음에 들어있던 것을 밖으로 꺼냈다. 그의 용기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그녀는 열악함 따윈 느낄 줄 모르는 사람인 듯, 기꺼이 에너지를 쏟아 그의 꿈을 위해 함께 한다. 그의 꿈을 향한 첫 단계가 완성이 된 날. 그녀의 마음을 간 보는 그에게, 알아듣지 못할 체코어로 답해주는 그녀. 어쩌면 그녀의 배려는 아직 여물지 않았을 뿐 이미 충분하다는 생각이 이 장면에서야 느껴졌다.


알쏭달쏭한 그녀의 마음을 끝내 모른 채, 그는 그녀에게 선물을 보내주고 본인의 내일을 향해 떠나간다. 본인의 현실 안에서 차분한 하루하루를 살고 있는 그녀 역시 그녀의 내일을 만날 것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로나마 전해보는 그녀의 마음


2020년 8월 18일.

코로나-19 수도권 확산으로 인해 사회적 거리두기 2단계가 시작되었다. 지난 2월 대구에서 확산되었던 때와 달리 수도권 확산은 체감이 달랐다. 중간에 2.5단계로 격상되는 것까지 보고 나니 어린 친구들에게 창피하기만 한 어른들의 짓거리가 생각보다 무거운 책임감을 쥐어주어, 저절로 몸이 사려졌다. 잡혀있던 약속들을 모두 취소하고, 회사 동료들 외에 다른 사람과의 접촉은 피하기로 했다.

3주간 주중에는 '집-회사-집-산책-집'으로, 주말에는 '집-산책-집-산책-집'이 기본 틀. 집 앞에 찾아온 사람과 서너 번 커피 한잔씩 사들고 걷거나, 차 안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것이 전부였다.

특별히 누군가와 만나지 않으니 누구와도 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나지 못하는 사람과 왠지 조금 더 애틋한 연락을 주고받게 되었고, 전에 비해 많은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사회적거리두기 2.5단계, 혼자하는 밤 산책


때론 나아지기 위해 휴지기가 필요하다.

사람의 관계가 그러하듯, 계속해서 가까이 붙어서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은 다른 위험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


처음으로 혼자 본 영화 ‘원스’, 서로의 내일을 위해 돌아서서 각자의 길을 향한 주인공 둘을 여전히 응원한다. 오늘은, 오랜만에 Once ost를 들으며 산책을 해야겠다.



내일을 위해, 잠시 안녕





영화 원스 Once (2006)

아일랜드 / 로맨스, 멜로, 드라마

(감독) John Carney

(출연) Glen Hansard, Marketa Irglova


이전 15화 보일 듯 말 듯 잡힐 듯 말 듯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