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리동 카페 ‘투영프로젝숀’
서울역 뒤편, 서부역이라 불리던 곳.
서울시 용산구의 청파동과 서계동, 그리고 서울시 중구 중림동과 만리동이 교집합 되는 곳이다. 작은 네 개 동네가 걸쳐져 있는 곳이어서인지, 아니면 서울시 관계자와 크게 싸움을 벌여 대대손손 원수로 남은 동네 지주라도 살았던 건지.. 아무튼 여기는 서울 한복판임에도 불구하고 어느 행정구에서도 돌보지 않는 듯, 인근 동네에 비해 관리나 발전이 월등히 뒤처져있는 오묘한 곳이다.
골목길에 들어서 고개를 잠시 들어보면 페르시안 고양이 털처럼 엉켜있는 전선이 축 늘어져 전봇대 사이를 잇고, 고개를 떨궈보면 반듯한 도로 바닥을 찾아보긴 힘들며, 주위를 둘려보면 평균 50년은 족히 넘겼을 저층 상가건물 사이로 오래되어 기운 집들이 등장한다.
2019년 봄. 이 골목 끝자락 언덕 회색 건물 3층에 생뚱맞게도 카페가 오픈을 했다. 발음도 쉽지 않은 투영프로젝숀.
이 회색 건물 애매한 지점에 1미터 50센티 높이 X 80센티 넓이 정도의 쇠문 하나가 덩그러니 뚫려있다. 고개를 숙이고 그 철문으로 조심스레 들어가면 다짜고짜 경사가 꽤 되는 돌계단이 시작된다. 그 계단을 예닐곱 개 오르면 정면에 작은 미싱 공장이 있다. 이 미니 사이즈 공장엔 꼬리가 안보일정도로 애교가 넘치는 하얀 포메라니안계 하이브리드견이 살고 있다. 귀요미와 인사를 나누고 우측을 보면, 보통-비만 경계에 있는 사람 기준 한 명씩만 간신히 지날만한 폭의 나선형 계단이 있다. 조심조심 올라가면, 80년대 건물 옥상 문으로 많이 쓰였던 반투명 유리가 섞여있는 알루미늄 문(좁은문)이 나온다. 휴우, 이제 도착이다.
알루미늄 문 앞에 도착할 때쯤, 보통의 현대인이라면 숨이 살짝 거칠어져 있을 것이다. 이 거친 숨을 달래며 손잡이를 밀면, 전축 사운드로 음악이 들리기 시작한다. 그간의 내 경험으론 음악 장르 비율은 클래식이 60%, 옛 가요(김광석, 이문세, 015B, 낯선 사람들, 이소라)가 30%, 올드 재즈가 10% 정도였다.
두 분을 합쳐도 분명 100kg에서 한참 모자를 솜털같이 가벼운 사장님 부부가 운영하는데, 두 분이 함께 계시기도 한분씩만 계시기도 한다. 한석봉 엄마는 떡을 썰고 아들은 글을 쓰는 것처럼, 남편분은 커피를 내리고 아내분은 디저트를 만든다.
오픈 기념 쿠폰에 쓰여있는 것과 달리, 이 매장과 사장님 부부의 첫인상은 그야말로 힙했다.
커피와 베이커리 쪽에서라면 평생 먹어댄 양(그에 들인 돈도)으론 어디 가서 밀리지 않을 내공을 쌓아온 터라 웬만한 곳에선 기대를 하지 않는 편인데, 왠지 이 가벼운 부부에겐 기대감이 올라왔었다.
다행히 기대는 실망으로 조각나지 않았고, 이곳은 나의 회사 인근 최애 카페가 되었다. 출근하면서부터 이미 기분이 상하는 월요일에, 이유는 모르겠지만 쳐지는 화요일에, 주말 근무를 앞두고 딱히 신나지 않는 금요일에도. 대부분은 직장 동료들과, 때론 이 오묘한 동네에 들러 나와 밥을 먹어주는 친구들과, 가끔은 조용히 혼자. 아마도 지난 일 년여 간 100번은 넘게 나선형의 좁은 계단을 올라 거친 숨을 달래며 피난처로 입장했을 것이다.
매장 안쪽에서 뻥튀기 기계 돌리듯 커피콩을 볶는 사장님은 로스팅이 만족스러운 날 위주로 “커피 맛이 괜찮으셨나요?”란 질문을 던진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알게 되었는데, 그 고백 아닌 고백이 너무 귀여워서 이후 저 질문을 들을 때마다 웃음이 터진다.
LP 음악이 깔리는 카페 안은 사장님이 테이블에 붙여놓은 ‘피난처’라는 단어와 딱 맞게 평화로운 편. 음악과 커피 향이 창밖에 보이는 바깥세상으로부터 나를 끌어당겨 위로를 해주는 기분이 든다.
그 경계가 느껴지는 순간의 기분이 꽤나 좋아서, 나는 일주일에 두세 번씩 이 곳에 와 맛있는 커피를 마신다.
내일도, 점심시간에 15분 정도의 짬이 난다면 투영프로젝숀으로 발걸음을 돌릴 것이다. 재난이라고 표현해도 전혀 어색함이 없을 일이 곳곳에서 멈춤 없이 터지고 있는 이 사회에, 피난처 하나쯤은 마련해둬야 하지 않을까?
피난처 한 곳쯤은 있어도 괜찮잖아?
*2021.01 운영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