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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CA Jul 29. 2020

교황님은 출타 중

2019.01 혼자 로마로 향하다 - No.2

관광객이 시야에 가득 차는 곳은 질색이지만, 바티칸 박물관을 예외로 두기로 한 것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흠모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부러 날이 궂은날을 노렸다. 무조건 입장 전에 인파가 담을 따라 늘어선다는 바티칸박물관 입성에 그나마 궂은 날씨가 줄 길이를 좀 덜어내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아직 날이 깜깜하고 추적추적 비가 오는 새벽, 호텔에서 나와 테르미니역으로 향했다. 로마에 도착한 지 36시간도 채 안되었고, 로마에서의 메트로 이용은 처음이었다. 악명 높은 테르미니역은 호텔에서 도보 10분 정도. 어느 도시를 가도 중앙역에는 노숙자들과 험상궂은 사람들이 머물고 있었으니 이곳도 비슷하겠지 했는데.. 너무 악평을 많이 듣고 와서인지 생각보다 역사는 깔끔했고 역 주변도 여유로웠다.


바티칸시국 입구에 가까운 역에 내려 빗물이 고여있는 돌계단을 올라와 모퉁이 작은 커피집에서 커피를 한잔 샀다. 커피집과 역 주변엔 소규모 바티칸 투어를 신청한 무리가 띄엄띄엄 모이기 시작했다. (물론, 한국인이 제일 많고요.) 궂은 날씨가 한몫을 톡톡히 한 건지 길지 않은 바티칸박물관 입구 줄에 들어서자마자 앞에 있던 투어팀의 가이드가의 입에서 '여러분은 운이 좋으시네요, 오늘은 정말 특별할 정도로 줄이 짧은 날이에요'란 문장이 흘러나왔다. 눈치게임 성공! 금세 박물관 안으로(물론 까다로운 검사를 마치고) 입장할 수 있는 행운을 많은 한국인이 누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며 내부로 들어섰다.


어느 곳에 멈춰서도 10분 안에 한국말로 설명해주는 가이드가 등장하는 곳


바티칸박물관의 아름다움은 도저히 사진엔 담을 수 없었다. 신을 믿고 안 믿고를 떠나 인간이라면 감탄을 멈추기 힘든 아름다움의 연속이었다. 사진 촬영이 불가한 시스티나 천장화는 문을 열고 들어가 마주하는 순간 소름이 돋았다. 시스티나까지 가는 길목, 곳곳의 미술 작품들이 쉴 새 없이 눈을 자극했다. 비수기와 궂은 날씨 특수로 사람이 특별하게 적은 날이라는 이야기는 바티칸 내부에서 수차례 들을 수 있었던 날이었다.


이 정도 인파면 행운의 날이라고 합니다


흠모하는 교황님이 이날 바티칸에 계시지 않다는 것은, 로마에 도착한 날 호텔까지 태워다 준 기사님께 이미 들었다. 어느 나라였더라, 외국 어딘가에 계시다고 했는데.. 교황이 계셨다면, 인파의 두려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미사가 있는 날에 왔겠지만 교황의 부재로 여유로운 바티칸을 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행운을 누렸지만 아쉬움은 물론 있었다. 성 베드로 성당 앞 광장에서 작은 창을 통해 손을 흔드는 프란치스코 교황을 직관한다는 것은 나에겐 너무나 멋진 일이었기에.


정말 저 당시 오빠들은 다 몸짱이었을까? 줄리엔강 뺨 때릴 몸매의 오빠들이 곳곳에 있었다


혼자 하는 여행의 장점 중 하나.

내 컨디션만 신경 쓰며 움직이면 된다는 것.

내가 움직이고 싶을 때, 움직이고 싶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것.

볼거리가 천지라 눈과 뇌가 과부하가 걸릴 지경인 곳에서 천천히 쉬엄쉬엄 보고 싶은 것은 한참, 머물고 싶은 곳에선 길게, 지나치고 싶은 곳에선 호다닥 움직일 수 있어서 정말 편안했다. 시스티나 성당 한편에 자리 잡고 앉아 목이 아플 때까지 한참을 올려다보며 천장화의 구석구석을 다 구경하고 나니 로마 도착 이후 처음으로, 혼자 있음에 대한 즐거움이 발하기 시작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각종 매체를 통해 봤을 때부터 이미 마음에 들었었는데, 직접 와서 건물 안에 들어서니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성당 곳곳을 천천히 둘러보고 광장에 나오자, 하늘이 파랗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쌀쌀하던 새벽의 날씨는 흔적도 없이 증발해있었다. 그야말로 천지창조 기분이 묻어날 것 같은 파란 하늘이 아름다운 광장을 뒤덮고 있어서 내 마음 역시 구름처럼 하늘로 향했다.


5시간쯤 지나 바깥으로 나오니 언제 비가 왔냐는 듯 기막힌 날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티칸시국 안에 우체국이 있다.

그곳에서 엽서를 보내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나라의 스탬프가 찍힌 엽서를 받아볼 수 있어서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날 흥분시킬 정도로 쾌적해진 날씨에 감탄하여 나의 행복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져 우체국으로 향했다. 당시에 가장 가깝던 친구에게 짧은 글을 적어 선명한 레몬색 우체통에 엽서를 넣었다. 그 친구는 나의 행복을 그대로(오해없이) 받았으려나?


광장에 반해서 또 한참을 광장에서 머물렀다.

바티칸은 한 번으로 안 되겠구나, 또 와야지. 마음을 먹고 나서야, 국경을 넘어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에 들어서 허기짐을 채우기 위해 인근 피자집에서 식사를 하고(여행 이후 영화 '두 교황'에서 교황 두 분이 마주하고 피자와 환타를 먹는 장면을 보며, 비슷한 경험이었던 이 순간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었다), 이탈리아의 자랑거리 중 하나인 젤라또까지 야무지게 먹었다. 젤라또 매장 스탭이 어찌나 '이태리 남자'스럽던지. 한국말까지 구사하며 호감을 표현하는 그의 끼에 몇 분간 즐거웠다.


이탈리아에선 매 끼니 후 묻다 먹어야 하는 젤라또, 꼭 드세요, 라지 사이즈로 잡수세요


시간은 아침에 호텔을 나섰을 때와 같은 숫자가 되어있었다.  바티칸 박물관을 모두 돌고 성당과 광장까지 돌았더니 내 발바닥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듯했고, 종아리 뼈가 물렁뼈가 되려고 하는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메트로를 탔다간 2~3일 정도 하반신을 못쓰게 될 것 같아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샤워를 했다. 1시간쯤 자고 늦은 저녁 호텔 로비 스탭에게 추천받은 식당을 향했다.

메뉴는 파스타.

오래된 식당은 포근한 느낌이 있었다. 파스타를 먹고 나오니 밤 11시가 넘어있었다. 도보로 20분 정도 걸리는 밤길을 걸어 호텔로 돌아왔다. 로마 체류 48시간이 흘렀지만, 로마는 소문보다 훨씬 안전한 나라로 기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관광객 대상으로 운영하는 장소만 피하면 얼마든지 친절하고 정겨운 서비스를 받을 수 있고,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이 가능한 도시였다. 여행 전 소매치기와 치안에 대해 걱정했던 마음이 그날 밤 산책길에 스르르 녹아버리고 있었다.




로마 시내 안전함에 대해 느끼고 난 뒤, 밤늦은 시각까지 여기저기 잘 쏘댕기기 시작했다. 계속 다시 와보라고 손짓하는 것 같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도 해저문 시간 다시 방문해서 낮과는 또 다른 광장의 아름다운 야경을 맛볼 수 있었다. 광장 한가운데서 듣는 성당 종소리는 정수리로 흡수되었다가 발뒤꿈치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상쾌하게 피로를 씻어줬다. 까만 밤하늘과 대비되어 반짝이는 하얀 건물들에 홀려 입안에 침이 좀 고이고나서야 발걸음을 돌려 나올 수 있었다. 비록 교황님은 출타 중이지만, 이 곳에 온 것은 여러모로 행운이었다.




돌이켜보니
아름다운 바티칸 시국을
코로나 시국이 오기 전 다녀온 것이
가장 큰 행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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