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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CA Oct 26. 2020

와중에 남쪽을 향해 떠났다-3

갈대밭에서 만난 가을

와중에 남쪽을 향해 떠났다-2

이 호텔은 분명 풍수지리 전문가들을 섭외해서 터를 잡았을 거다. 수면의 질이 높디높다. 여행 마지막 날, 저녁 7시 반 KTX로 서울에 올라갈 예정. 다섯 시 반에 눈이 떠졌고, 지난 아침과 마찬가지로 꿀잠으로 인한 가뿐함이 발바닥까지 느껴졌다. 짧게 잘 자게 되니, 여행 일정이 조금은 길어진 셈이다.


아직 꿀잠 속 깊이 자리하고 있는 일행을 깨우면 안 되니까 조심조심 세수랑 양치를 하고 호텔 로비로 내려왔다. 피트니스센터가 6시에 오픈한다고 해서 밖으로 나와 바다를 구경하며 남은 15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호텔 앞바다, 아침


까맣던 하늘 끝에 오렌지색이 스며들기 시작하더니 십여 분 만에 하늘색이 변한다. 아무도 없는 호텔 앞에서 하늘과 바다를 보는 잠시 동안, 오랫동안 잊고 살던 내 몸 구석구석까지 붉은 기운이 닿을 정도로 머릿속을 멈추고 있었다. 도무지 머릿속의 생각을 멈추지 못해 그 피로함을 호소하고 싶던 적이 셀 수도 없이 많았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귀하디 귀한 시간이었다.


피트니스센터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러닝머신에서 빠른 걸음으로 조금 걸었다. 오늘은 조식을 먹기로 예약을 해놔서 방에 올라와 일행을 깨워 식당으로 내려왔다.


호텔 조식 좋아하는 사람, 나야 나


호텔 체크아웃을 하고 순천만으로 향했다. 쨍한 해가 어제보다 뜨거웠다. 순천만에 다녀와본 일행의 조언으로 가벼운 옷차림에 운동화를 챙겨신었다. 국가정원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이미 이곳의 규모가 엄청날 것이라는 감이 왔다. 국가정원에 들어가니 여러 나라별로 꾸며놓은 정원들이 이어졌다. 촌스럽기도 이쁘기도 한 정원들을 반쯤 보고, 순천만 습지로 이동하는 스카이큐브를 타러 갔다. 귀여운 스카이큐브는 제법 날쌨고 순천만 습지까지 가는 동안 깨 발랄한 속도와 시원한 큐브 안 에어컨 시스템 덕에 신이 났다.


스카이큐브에서 내려 넓은 갈대밭이 펼쳐지는 산책로로 들어섰다. 걷는 데는 어느 정도 자신있는터라 일행과 함께 조잘거리며 길을 따라 걷기 시작. 영화 랍스터의 한 장면 같기도, 영화 마더의 김혜자 엄마가 춤을 추던 장면 같기도 한 갈대숲이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그늘 한 조각 없는 길이라, 10월 초지만 강한 햇빛이 이마를 내내 때렸다. 지방 국도 휴게소 같은 작은 카페 겸 식당이 있길래 바로 들어가 맛은 정말 없지만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사 마시고 습지 가운데로 향했다.


키가 꽤나 큰 갈대숲@순천만


뒤로는 짙은 녹색의 산이, 옆으로는 천이 흐르는 습지는 예상보다 더 멋있었는데, 갈대숲 사이 부서지는 바람이 귓바퀴를 따라 멈추지 않고 귓속을 간지럽혀서 몽환적인 기분이 하늘에 떠있는 구름처럼 몽글몽글.

습지 바닥엔 어두운 진흙이 덮여있고 그 촉촉한 땅에 게들이 살고 있었다. 영화 랍스터를 생각한 곳에 게가 살고 있다니, 오늘은 갑각류를 먹어야 하나?!(TMI-여수로 돌아가는 길에 광양불고기를 먹기로 정해져있었..)


언제 또 이렇게 흐드러진 갈대숲을 거닐 수 있겠냐 싶어 넓은 갈대숲에 만들어진 길을 완벽히 걷기로 했다. 이마는 더 뜨거워졌고 선글라스 자국이 남을 테지만. 까짓, 그럼 어때 뭐. 마더의 혜자 엄마마냥 춤이라도 추고팠지만 그 마음은 고이 접어두고, 갈대숲의 내음과 바람소리를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도록 짙게 느꼈다.


다시 졸귀 스카이큐브를 타고 국가정원으로 돌아와 몇 개 국가의 정원을 슬렁슬렁 보며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지만 직접 본 적은 없는 핑크 뮬리가 눈앞에 등장하여 다시 한번 발걸음을 멈췄다. 핑크 뮬리는 멀리서 봐야 아름다운 식물임을 알게 되었지만, 사진에 찍힌 색감은 정말 화사하고 예뻤다.


떨어져서 봐야 찐, 핑크 뮬리


광양에 들러 이번 여행 마지막 끼니로 광양불고기를 배불리 먹고 여수로 돌아왔다. 기차 시간이 한 시간 반쯤 남았길래 ‘여수밤바다’ 주인공이라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들렀다.

12시간 전과 반대로 붉은 끼가 걷히며 회색이 섞인 진청색이 하늘에 스며들기 시작한다. 커피를 마시고 방파제에 나와 하늘과 바다 구경을 마저 했다.(온몸의 털이 바짝 서게 만드는 방파제 벌레를 보고 기겁하여 길게 있지는 못했지만, 잠시나마 바라본 하늘과 바다는 언제나처럼 경이롭다.)


오리진 of 여수밤바다


여수엑스포역 주차장에 렌트한 차를 반납하고 엑스포 광장에서 컴컴해진 밤바다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2012 여수 세계박람회 당시 왔었는데, 벌써 8년이 흘렀구나.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지난 8년간 아쉽게도 잃어버린 것, 감사하게 얻게 된 많은 것들을 떠올려보았다. 당분간 해외여행은 어려운 상황이니, 국내 여행을 종종 다녀야겠다.


오랜만에 느껴본 여행의 피로감과 즐거움, 그리고 나에 대한 격려까지. 급속도로 다가온 가을과 함께 꽉 채운 여행 3일이 흐뭇하게 맞물렸다.




가을엔, 여행을 하겠어요




추신. 순천만에 놀러 갈 땐 브이넥 입고 가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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