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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CA Jan 19. 2021

내가 존재할 수 있는 곳으로

영화 아이엠러브 I Am Love

요 며칠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오래된 친구들의 현재가 왠지 모르게 나를 처연하게 만들었고, 지난 주말엔 몹시 씁쓸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내 또래의 중년들이 보통 그러하듯, 친구들은 이미 세속적 모드에 진입한 지 오래다. 너무나 당연하고 일반적인 흐름인데, 철이 없는 나는 그 점이 몹시 버겁곤 하다. 얼마간은 나 혼자 뒤처진 것이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지금의 감정은 그냥 이 자체가 순리임을 인정하는 것이 내 삶의 큰 재미 하나를 빼앗기는 것 같아 슬픈 것 같다. 나 빼고 모든 사람이 다 하고 있는 것 같은 그놈의 ‘주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을 꿈뻑이며 듣고 있기도 이젠 못할 짓이다 싶다. 돈놀이 재미를 모르는 멍청이로 계속 버티기도 쉽지 않구나. 휴우.


콜미 바이 유어 네임의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그리고 틸다 스윈튼. 이 두 명만으로도 땡기는 영화 ‘아이엠러브’는 이미 십여 년 전 영화인데, 영화관에서 보고 싶은 마음에 부러 애껴뒀던 영화 중 하나. 역시나 애정하는 아트나인에서 재개봉을 해주어 부랴부랴 다녀왔다.


엄청 큰 산 같은 포스의 제목


영화는 지난 눈 내리던 밤처럼 포슬한 눈이 한껏 쏟아진 밀라노의 밤을 훑으며 클래식하게 시작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의 뉴욕 필터 색감으로 보이는 밀라노의 모습은 여행 못가 안달 나 있는 지금의 나를 한껏 약 올렸고, 따라붙어 들려오는 음악도 당장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고 싶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드디어 우리의 ‘엠마’가 명품을 휘감고도 전혀 상스럽지 않게 우아함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장착한채 등장한다. 그녀는 알아주는 재벌가 며느리이자 세 남매의 엄마이자 돈 냄새 뿜 뿜 나는 남편의 아내이다. 엠마를 포함 모든 식구들은 완벽하게 고급스럽다.


엠마는 본래 러시아에서 미술 복원을 하던 아버지의 딸로 평범하게 살다가, 미술품을 구매하러 드나들던 남편을 만나 그를 따라 밀라노의 저택에 입성했고, 남편이 지어준 이름 ‘엠마’로 완벽하게 이탈리아에 적응한 듯 살고 있는 사모님이다. 가족의 수장이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집안 사업을 남편과 큰 아들이 물려받게 되며 남편과 아들들은 해외 출장이 잦아 집을 비우기 일쑤이고 투명한 유리알 같던 딸은 동성애자임이 드러난다. 이때부터 엠마의 호수 같던 일상에 작은 떨림이 생긴다.


본래의 나로 살겠다고 밝히는 딸과 그로인해 흔들리는 엄마


딸이 동성애자임이 밝혀지는 건 세탁소에 맡긴 옷에서 발견된 딸이 큰 오빠에게 쓴 편지(사진과 CD가 동봉)때문인데 그 내용이 몹시 따뜻하다. 콜미 바이 유어 네임에서 아빠가 엘리오에게 전한 위로와 결이 비슷하여 감독의 취향을 잘 담은 내용이라 생각되었다.


둘이 하나가 되는 건 혼자인 것만큼 멋진 일이야. 우린 용기를 내야 해.
이건 친구가 들려준 노래의 가사야.
사진 속에 있는 친구지. 이름은 앙가라드.
오빤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사람이야.
나 여자를 만나왔어.
그레고리오(옛 남자 친구)는 모르는 척 계속 나에게 연락을 해. 모를 수도 있겠지.
이제 난 앙가라드를 사랑해.
그녀도 나를 사랑하는지, 여자를 좋아하는 사람인지는 몰라. 그렇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해?
오늘도 그녀가 날 보고 웃어줬는데.


딸의 비밀 아닌 비밀을 알게  엠마는 밀라노 대성당에 올라가 생각에 잠긴다. 어쩌면 딸의 고백이 부러운 것도 같다. 본인을 제외한 모든 가족 구성원이 누리는 ‘본인으로 사는 자유 본인만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그런 생각을 했을 것이라 짐작해본다. 뒤숭숭한 마음에도 집안에서의 역할을 해내기 위해 시어머니와 장래 며느리를 위한 식사를 하고자 방문한  식당.  식당 셰프는  아들의 친한 친구로 소위 엠마의 집안에서 칭하는 평민 계층 남성이다. 그가 만든 음식을 입에 넣었을   영화의 명장면  하나인 엠마의 ‘foorgasm’ 펼쳐진다. 그리고 그녀는 셰프/아들 친구 ‘안토니오에게 끌리기 시작한다.


안토니오는 우아함에 찰떡이던 엠마의 머리카락을 잘라낸다


안토니오 역시 엠마에게 호감이 있다 못해 넘쳐나던 터라 둘은 급격하게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둘의 사랑을 위해 미리 마련해둔 것 같은 안토니오의 시골집은 밀라노에서 두 시간 정도 떨어진 외각, 울창한 나무와 꽃이 만발한 길을 따라 굽이 굽이 들어가야 하는 산동네에 자리하고 있다.


엠마는 이곳에서 늘 치장하고 있는 명품들을 벗어던지고 안토니오의 후줄근한 러닝셔츠로 갈아입고 자유를 만끽한다. ‘우아한 중단발 머리 스타일의 정석’이란 책이 있다면 실려있을 것이 확실한 기존 그녀의 헤어스타일도 안토니오의 가위질로 도려내 졌다. 엠마는 그간 속에만 품고 있던 본인의 취향을 드러내며, 본인조차 잊고 살던 본명 ‘키티쉬’를 안토니오에게 알려준다.


안토니오는 셰프/헤어드레서 인가


엠마의 머릿속이 온통 사랑으로 가득 찬 순간, 끔찍한 사고가 발생하고 그녀는 넋이 나가버린다. 영화 내내 명연기를 펼친 틸다 스윈튼이 ‘어나더레벨’의 경지로 가기 시작하는데, 나는 이 순간부터 엠마의 모든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영화의 하이라이트인 이 부분은 상세히 나열하지 않겠다. 혹시라도 아직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이 이 글을 먼저 읽어서 나와 같은 희열을 못 누리게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다.


그리고 얼마 전 유아인이 ‘나 혼자 산다’에서 명연기로 꼽았던 마지막 장면이 나오는데, 그때까지 죽여준단 표현이 걸맞을 음악이 관객들을 휘감는다.


아, 영화가 끝났지만 내 머릿속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요즘 나를 괴롭히던 내 안의 작은 소용돌이가 온전히 내 부족함때문은 아니라고, 누군가에겐 반대의 길이 이상향일 수 있는 것뿐이라고 들려주는 것 같다. 나에 걸맞게 살고 싶은 나와, 본래의 모습으로 누리고 싶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키티쉬를 응원한다.





당신이 알던 예전의 나는 존재하지 않아요





아이엠러브 I Am Love, 2009

이탈리아 드라마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

(출연) 틸다 스윈튼, 에도아도 가브리엘리니, 알바 로르와처, 플라리오 파렌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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