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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CA Mar 16. 2021

누구나 뽑아 먹을 수 있는, 미나리

영화 미나리 Minari 2020

부모님 모두 집안의 막내였으므로, 나는 할머니를 만나 뵙지 못했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 친가 할아버지와 양가 할머니 모두 돌아가셨고, 외가 할아버지만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실 때까지 살아계셨다. 소설, 영화, 드라마, 연극, 광고 등 많은 채널을 통해 '할머니' 정서를 담은 것을 많이 접해왔지만, 직접 경험이 없는 난 그 감정에 대해 정확히 느끼지는 못하고 살아왔다. 짐작해보건대 아마도 '할머니'는 '무조건적으로 나를 아껴주시는 분'이 되겠거니 해왔는데, 이번 영화 '미나리'를 보면서도 역시나 같은 결로 감상이 되었다.


영화 '미나리'에 대한 호평은 꽤나 오래전부터 접해왔지만,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관련 기사나 글을 부러 읽어보지 않았다. 그저 미국에 이민 간 한국 가족 이야기란 정보만 갖고 영화가 개봉한 주간 금요일 밤에 기대를 안고 영화관을 찾았다. 솔직히 말하면 어느 정도 예상한 스토리가 있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10분도 안되어 내 예상은 빗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80년대.

30여 년 전 그 시절을 나 역시 기억한다. 인터넷 상용화가 되고나서부터 급변한 현재와는 전혀 달랐던 시절. 신학기 때 학급에서 "집에 TV 있는 사람 손들어", "집에 세탁기 있는 사람 손들어" 전자 제품 하나하나 짚어가며 호구조사를 했었다. "집에 차 있는 사람 손들어" 질문에서는 손 든 친구를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던 눈빛들이 반짝이기까지 했다. 지금으로썬 말이 안 되는 많은 시간들을 만나고서 찐 '글로벌 시대'인 지금에 도착했는데, 마냥 '왓 어 원더풀 월드!'는 아니다. 가난이 많은 사람에게 디폴트였고 대책 없는 것, 부족했던 것이 투성이었지만 그때의 허술함이, 그때의 흙냄새가 종종 그립다.



할머니 단골 멘트 : 누가 우리 손주를 다치게 했어?


그 그리움의 대상으로 할머니(윤여정)가 가장 큰 무게를 갖고 등장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밝은 에너지로 표현하는 윤여정 배우의 할머니, 정이삭감독이 얼마나 할머니를 그리워하는지 충분히 알아챌 수 있을 캐릭터였다.


"오구오구 내 새끼. 금 같은 내 새끼."


아마도 많은 성인들이 가장 목말라있을 대접  하나일 '무조건  '. 그 로망에 바로 이어지는 할머니.(데이빗으로 나오는 배우 Alan S. Kim 어찌나 귀여운지 할머니가 아닌 나도 보는 내내 볼따구를 깨물어주고 싶었다.) 낯선  만남이 멀어질수록 데이빗 가슴에 할머니는 깊은 우물처럼 자리 잡게 된다. 영화 후반 할머니를 챙기는 데이빗 대사를 통해 거위털 이불속으로 들어가는 겨울밤처럼 따뜻함을 느낄  있었다.



데이비사~! 데이비사~!


"미나리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서 누구든지 뽑아 먹을 수 있어.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간에 다 뽑아 먹고 건강해질 수 있어."


향채를 좋아하는 나에겐 고수, 샐러리와 비슷하게 향긋한 식재료인 미나리.

독소 배출에 효과가 좋은 채소로, 첫 재배까지는 더디지만 이후 다른 식물에 비해 빨리 자라며 벌레나 병을 잘 견뎌낸다고 알고 있다.


병아리 감별사로는 특출나졌지만 계속 병아리 궁둥이만 쳐다보며 살기 싫은 제이콥(Steven Yeun)은 도시에 살던 아내, 자녀와 함께 시골 농장으로 옮겨온다. 제이콥이 이곳을 고른 이유는 흙 색깔 때문. 프로 농부가 되겠노라 기름진 흙에 유혹당했지만, 가난이 동반된 농린이 제이콥의 일상은 생각보다 훨씬 버겁다.   


보란 듯이 해내고 싶지만 맘 같지 않은 현실에 몇 차례나 부서져 어깨가 남아날 틈이 없는 제이콥 역할의 ‘스티븐 연’ 연기가 갈색 농장을 꽉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옥자’, ‘버닝’에서 만났을 때도 연기 참 잘한다했었지만, 이 정도까지 소화하는 배우인지 미처 몰랐다. 앞으로 그가 보여줄 연기에 대한 기대가 한껏 올라갔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을 향하는 가족


바로 몇 시간 뒤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것도 모른 채 제이콥이 처음으로 뭔가 이뤘다 싶어 아드레날린을 왕창 쏟아낸 한인 슈퍼마켓. 그의 아드레날린이 흩어지기도 전에 꾹꾹 눌러 담고 있던 모니카(한예리)가 속을 뒤집어 내놓는 주차장 씬은 이 영화의 백미. 80년대, 미국, 아픈 아이가 있는 부모로서의 특수함 따윈 그저 거들뿐 우리는 모두 온전한 사랑을 바라는 평범한 인간임을 강렬하게 드러낸다. 아마도 영화 ‘미나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보편적이고 소박하지만 지켜지기란 몹시 힘든 이 마음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보이는 게 안 보이는 것보다 더 나은 거야.
숨어있는 게 더 위험하고 무서운 거란다.





미나리 Minari (2020)

미국 드라마

(감독) 정이삭/Lee Isaac Chung

(출연) 윤여정, 스티븐 연/Steven Yeun, 한예리, 노엘 조/Noel Cho, 앨런 김/Alan S.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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