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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SICA Feb 11. 2021

불꽃 없이 지구에 오는 영혼은 없어

영화 소울 Soul

사계절 중 뉴욕을 가장 돋보이게 하는 것은 단연코 가을이었다.

가을에 맞춰 뉴욕을 방문했을 당시 숙소가 8th Ave/55th st 부근 40층짜리 아파트였는데, 좌측 끝내주는 공원이 나머지 마천루의 뷰와 어우러져 그냥 멍하니 내다보고만 있기만 해도 행복감이 찾아왔었다. 아침에 일어나 토스트기에 빵을 넣으면 아파트에 가득 차는 고소함, 그때 한창 꽂혀있던 아몬드 우유와 블랙베리를 곁들여 먹던 빵의 파사삭한 식감마저 그 계절에 완벽하게 섞여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내가 뉴욕을, 뉴욕의 공원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선 이미 작성해둔 글이 있기에(https://brunch.co.kr/@halee204/34) 길게 적지 않으련다.


딱 그 색감의 그 계절 가을, 영화 소울의 주인공 '조'가 뉴욕에서 만난 누군가와 흡사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영화에서 나오는 뉴욕은 진짜 뉴욕을 그대로 옮겨온 것 마냥 현실적이다. '조'가 발을 디디는 곳곳이 내가 지나갔던 그곳이구나 싶어 바로바로 머릿속을 바삐 움직였다. 어쩜 이렇게까지 잘 옮겨놓았을까 하며 뉴욕에 치이기 시작하려는데, 갑자기 맨홀(나에게 늘 공포의 대상)에 빠져버린 조가 ‘미지의 세계-죽음 앞의 대기 선 > 태어나기 전의 세상'으로 나를 이끈다.


귀욤폭발, 깨물어주고 싶은 까칠 시크 도도 22호


그리고 지구로 가는 통행증을 받으려 대기 중인 올망졸망 귀욤 폭발 '태어나기 전의 영혼들' 사이, 시크함을 휘감아 두른 우리의 "22호"가 등장한다. 마더 테레사 마저 포기한 영혼인 22호는 지구에 갈 의지가 없다. 그냥 이모저모 구경하며 특별한 스트레스 없이 존재할 수 있는 태어나기 전의 세상에 사는 것이 만족스러울 뿐. 까칠한 줄만 알았던 22호가 지구로 돌아가고픈 조를 심과 신 그 사이 어디쯤에 존재하는 인물들이 모여있는 세상으로 데려가 '문윈드'에게 소개해준다.


문윈드가 있던 곳에서 넋이 빠져 있는 '세상과 단절된 영혼들'의 모습을 보니, 도량이 좁은 내 머릿속엔 요즘 한창 불만이 쌓여있던 '주식 얘기만 해대는 친구들'이 떠올랐다. 아쌀한 맛을 보며 편협한 나 자신을 반성하고 있는데, 문윈드의 도움을 받아 지구로 돌아갈 준비를 하던 조가 급한 마음에 서두른 탓에 고양이 몸으로 흡수되고, 비어있는 조의 육신엔 22호가 입장하게 되어 버렸다.


현재의 자신을 바꿔주리라 믿는 큰 불꽃을 쫓는 조와, 불꽃이 안 붙는 본인의 상황에 안주해버린 22호의 두 영혼이 얽힌 채 뉴욕에 도착. 처음 마주한 생동감과 혼란에 당황한 22호에겐 평범한 뉴요커 일상 하나하나가 모두 생경하다. 두렵지만 흥미로운 기분, 처음 해외여행을 시작했을 때 내 모습 같다.


내 육신에서 멀어진 채 그동안의 본인의 삶을 바라보던 조는 본인의 삶이 너무 싱거워서 '무의미했다'는 표현을 하고 다시 한번 본인의 일상을 바꿔줄 무대를 향해 분주하게 움직인다.


외모마저 취저인 이발사 데즈, 길이길이 행복하소서~!


22호에게 뺏겨버린 것 같은 자신의 육신이 중대한 오늘을 망칠까 봐 모든 것에 신경이 쓰이는 조. 소통이 가능한 22호에게 하나하나씩 단계를 밟으며 꿈꿔왔던 목적을 이루려고 애를 쓴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의 마음이 생각과는 달라 당황스럽다. 아마도 감동스러우며 미안했겠지?


특히나 인상 깊었던 것은 이발사 '데즈'와의 대화 씬. 수의사를 꿈꿨던 데즈는 가정 상황 때문에 이발사의 길로 접어들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처지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처한 현재에서 발견하는 행복들로 웃을 수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모처럼 자신 얘기만 해대던 조가 본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 아마도 이발사 데즈의 이 소박하지만 찬란한 삶을 대하는 태도가 영화 '소울'의 핵심이 아니었을까.



말해뭐해 뉴욕의 가을


조에겐 평생을 꿈꿔온 특별한 날이고, 22호에겐 경험해본 적 없는 평범함이 감격스러운 하루. 서로 반대쪽 끝을 바라보며 바쁜 마음을 따른다. 본인의 꿈에 도착할 수 있는 데뷔 무대를 위해 평소 자신이 음악 하는 것에 불만이 가득한 엄마의 의상실에 도착한 조, 하지만 엄마는 아들의 행복에 기꺼이 동참해준다.



한 가지 놓칠 수 없는 에피소드 - 사라진 조의 영혼을 찾고 있는 '테리'

본인의 실수를 용납할 수 없는 테리는 영혼 하나가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곤 집요하게 자료를 뒤지고 품을 팔아 조가 있는 지구까지 따라온다. 이때 테리의 형태가 아주 인상적이다. 선(line)으로 변할 수 있는 테리는 사람들의 눈을 샤샤삭 피해 바로 옆에 숨어들어 존재할 수 있는 형태라는 점. 타인에 대한 배려나 상황을 즐기는 것 따윈 모르는 테리는 마치 맑았던 영혼을 꼬드겨 닳아버리게 만드는 세상의 날카로움 같다. 시나브로 곁에 숨어들어 우리의 영혼이 느슨해지는 순간을 훔쳐보고 있는 테리가 존재할 것만 같아 순간 공포스럽기도 했다.


데즈와 엄마를 향한 본인의 옹졸한 오해가 있었음을 깨닫고 꿈의 무대 '하프 노트'에 도착한 조. 모두가 열광하는 훌륭한 연주를 선보이고 났는데, 이게 뭐지? 뭔지 모르게 허무한 조의 표정을 읽은 도로테아가 극적인 변화 따윈 없이, 이제 이 시간이 그저 네 일상이 될 거라며 짧은 이야기를 하나 건네준다.


그야말로 멋진 언니-도로테아


한 어린 물고기가 나이가 지긋한 물고기에게 다가와 이렇게 말했다.

"전 바다라고 불리는 엄청난 것을 찾고 있어요."

"바다? 지금 네가 살고 있는 곳이 바다야."

그러자 어린 물고기는 "여기는 그냥 물이에요. 내가 원하는 건 바다라고요!"


그녀의 말을 듣자  시간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을 보며 황홀한 표정으로 ‘이런 곳을 걷는 것이 내가 찾던 불꽃이었던  같다말하는 22호에게 ‘그건 그냥 사는 거지 불꽃이 아니야'며 냉담하게 답한 자신이 떠오른다.


그 하루의 끝에서야 반대쪽을 바라보고 있던 22호의 심정을 이해하게 된 조는 진심을 전하기 위해 22호에게 향한다.


조와 22호가 손을 잡기까지의 따뜻한 여정, 영화 소울


“나는 딱히 좋아하는 것이 없어, 시간이 날 때 뭘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난 너무 평범해. 다들 특별한 것들이 있는데, 나만 뒤쳐지는 기분이야.”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치열하게 고민하는 문제에 대해 담담한 위로를 전해주는 영화 소울.

개인적으론 22호가 불꽃을 발견하는 순간과 몹시 흡사했던 지난 경험이 소환되어 상당히 뭉클하기도 했다. 앞으로도 변함없이 현재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작은 감격들과 찬란한 아름다움을 (맛있는 음식도 잔뜩) 먹고사는 내가 되었으면 좋겠다.



I'm Going To Live Every Minute Of It.




소울 Soul (2020)

미국 애니메이션

(감독) Pete Docter, Kemp Powers

(출연-목소리) Jamie Foxx, Tina Fey, Graham Norton, Rachel Hou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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