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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도둑 May 01. 2020

커피팔이 소년

나의 시작, 나의 도전기

어쩌면 이제는 커피팔이 소년이 아니라 청년이란 단어가 더 어울리는 듯하다. 나는 어쩌다 커피팔이 청년이 되었을까. 우습게도 그 이유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나에게 책이란 도피처였다.


어릴 적, 부모님이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독서였다. 컴퓨터 게임 대신 부모님이 사 오신 책을 읽으며 방을 뒹굴거렸다. 게임 그만하라고 야단치던 부모님이 책을 읽을 땐 별말 없었다. 그저 자세 똑바로 하고 읽으라고 말하시던 게 전부였다. 공부는 하기 싫고, 심심하긴 했으니 결국 책이 내 유일한 도피처가 될 수밖에.


책 속으로 도망치는 것은 학교를 넘어서 군대와 회사까지 이어졌다. 군인 시절, 온갖 부조리와 가혹한 자연환경에 노출되었을 때 유일한 위로가 되었던 것도 책이었다. 생활관에서 티브이 보는 것조차 눈치 보이던 시절엔 병영 도서관이 안식처가 되었다. 그때 처음 느꼈다. 하루 종일 공부를 하거나, 하루 종일 게임을 하진 못하더라도 하루 종일 책을 읽을 수는 있구나. 나는 책을 읽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구나.


회사에 처음 취직해, 혼자서 멀리 떨어진 지방에서 일하게 되었을 때도 책은 늘 옆에 있었다. 회사 기숙사 근처엔 시립 도서관이 있었고 그곳에서 주말을 소비했다. 일을 하면서 받았던 스트레스도, 불안한 감정도 그곳에서 다독였다. 그러던 중, 회사의 비리와 불황으로 내 일상이 위태로워졌을 때 어떤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배우 짐 캐리의 졸업연설 영상이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도 실패할 수 있다. 때문에 기왕이면 사랑하는 일에 도전해보는 것이 낫다."


책이 떠올랐다.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고 싶었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이런 책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나곤 했다. 그 욕심의 첫 발자국은 일기와 서평이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고 서평을 공유하면서 내가 읽은 책들이 단순히 재미와 시간 때우기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했다. 내가 사랑하는 일이 독서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자, 나는 퇴사를 결심했다.


글을 팔아서 먹고사는 글쟁이가 되기엔 필력이 너무나 부족했다. 다시 대학에 들어가서 배우자니 너무 늦은 것처럼 느껴졌다. 책과 글이 공존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내가 늘 가서 책을 읽던 카페가 생각났다. 그곳에선 사람들의 수다와 카페의 음악소리가 들렸고, 책에 몰입하는 순간 소리는 사라지곤 했다. 북카페를 차리면 어떨까, 내가 좋아하는 책에 둘러싸여서 커피와 책을 팔고, 결국에는 내 글까지 팔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어떨까 싶었다.


그렇게 카페에서 일을 시작했다. 커피를 내리는 방법을 배우고, 에스프레소 머신을 다루는 방법을 배웠다. 커피의 세계는 보다 복잡하고 어려웠으며 내가 상상했던 여유로운 모습의 바리스타는 보다 힘들고 고된 일상을 내포하고 있었다. 카페에서 일을 시작하자, 정작 책과 글이 뒷전이 되어버린 순간이 있었다. 힘겨운 일상에 지쳐서 내가 사랑하는 일을 뒤로 미뤄버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독서모임을 만들고 대학교를 갔다. 낮에는 일을 하고 월요일 저녁에는 독서모임을 갔다. 저녁에는 야간대학교를 다니면서 공부를 시작했다. 일이 끝나고 학교를 가기 전에 책을 읽었다. 읽었던 책을 모임 사람들과 공유를 하고 서평을 쓰니 보다 재밌게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좋은 책은 즐겁게 공유했고, 별로인 책은 신랄하게 깍아내리며 모임을 이어나갔다. 


바리스타로 커피를 팔면서, 학생으로 공부를 하면서, 모임장으로 모임을 운영하면서 다채로운 경험이 차곡차곡 쌓였다. 한 편의 글감으로 경험을 뱉어내고, 다시 읽어보며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글이 단순한 배설에 불과했다면, 지금은 올바르게 배출하는 방법을 배우려 노력하고 있다.


처음 퇴사할 때, 카페를 차리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4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카페라는 꿈은 목표가 되어 불안정한 현실 앞에 들이닥쳤다. 이미 주변 사람들에게는 '카페 차릴 거다.'라고 다 말해놔서 도망칠 수도 없다. 나는 다 계획이 있어야 했다. 계획은 글을 쓰는 지금도 조금씩 수정하고 있지만 나만의 카페를 차린다는 목표는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책을 좋아하던 소년은 커피팔이 청년이 되었다. 책과 글을 읽고 쓰며 하나둘씩 쌓아갔다. 종국에는 글쟁이 노년이 되어 '작가'라는 타이틀을 획득할 때까지 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쓸 생각이다. 누군가가 나의 글에 위로받고 안식처로 삼는 그 날이 올 때까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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