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티 스투키
가만히 있는 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문에 시선을 돌렸다. 창문에는 빗방울이 미끄러진 흔적을 남기며 다음에 맺힐 빗방울을 위한 길을 만들고 있었다. 그걸 조용히 응시하는 눈과 다르게 나의 머릿속은 그녀를 그리는 중이었다. 아르바이트하는 곳에서 처음 만나게 된 그녀. 자연스레 그녀와 나 사이는 이미 가까워져 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던 그날 저녁, 난 가슴속에 천국의 계단이 펼쳐지는 듯한 환희에 벅차올랐다. 지금도 그날의 기쁨을 떠올리며 혼자 주체할 수 없는 만족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새벽 1시에 그녀에게 밤 인사를 건네고 난 후의 여운을 1시간째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혼자서 감탄을 질러보기도 하고 그때의 나를 칭찬해보기도 하고 나지막이 그녀를 좋아한다고 연신 되뇌기도 하면서.
비가 희미한 바람을 타고 창문을 두들겼다. 노크 소리에 창문을 열어 빗 냄새가 달큰히 섞인 바람을 내 방에 들였다. 이대론 잠이 오지 않았다. 여운이란 지나간 것에 대한 깊은 선망이기 때문이다. 끝나지 않길 바란 게 끝나버린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밤이 깊었어도 이 순간을 이대로 보내긴 아쉬웠다. 그래서 생각해냈다. 그녀를 위한 러브레터를 쓰기로 했다. 지금의 여운을 내일의 나에게 전해주는 일을 하고 난다면, 미련 없이 기쁘게 잠을 청할 수 있을 거란 생각으로.
나는 편의점에 가기 위해 옷을 입고 우산을 챙기고 밖을 나갔다. 밖에 나오니 지금 당장이라도 그녀를 만나러 가고 싶었다. 그 정도로 그녀가 좋았다. 편지지를 사고 돌아와서 습기에 젖은 몸을 말렸다. 습해진 몸에 미열이 돌았다. 이 섬세한 온도의 미열은 몸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나의 감정선을 조심스레 자극했다. 피가 도는 게 느껴지고 아직 가시지 않은 밤공기의 차가움에 새벽 감성이 내려앉았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이 난 펜을 꺼내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이런 러브레터를 쓰고 싶었다. 훗날 그녀가 누군가에게 이렇게나 열렬히 사랑받았던 여자였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내가 빚어낸 감정의 반짝임을 어떤 언어로 표현할지 감이 안 잡혔다. 간단한 안부 인사부터 할까? 그러면 너무 새삼스러워 보이지 않을까? 최대한 능청스럽게 시작할까? 이런 간단해 보이는 고민조차도 내 인생의 분기점과 같은 신중함을 발휘하게 했다. 그녀를 향해 가는 길이 그리 멀게 느껴지면서도 소중히 여겨졌기 때문이다.
첫 문장마저도 그렇게 썼다 지우며, 고민을 거듭했다. 마음속에는 무수히 많은 꽃들이 피어나는데 그 꽃들의 이름을 모르는 느낌이었다. ‘뭐라 표현해야 하지? 어떻게 적어야 할까? 일단 그냥 막 적어보자.’ 나는 연습장에 그녀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막 적기 시작했다. 손가락은 아파지고 약지에 흑심이 묻어가도 난 개의치 않았다. 뭐에 홀린 것처럼 난 오직 내가 써 내려가는 그녀를 향한 말들에 빠져들어갔다. 눈썹이 떨리는 몽롱함과 함께 아름다운 그녀의 세계에 몰두하며 관능미의 움틀 거림을 느꼈다.
그녀를 내 마음속의 심상에 초대하여 관찰하고 표현하며 둘만의 축제를 벌였다. 내 곁에 없어도 그녀는 나와 함께 밤을 보내주었다. 그렇게 나는 은근히 피를 데우는 미열을 띄고선 마음껏 여운을 누렸다. ‘널 너무나 사랑해서 난 편지를 썼어. 이 순간의 나를 사랑해줘. 그럼 나 역시 너를 영원히 사랑할 테니.’ 이 구절까지 쓰고 나니 어느덧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연습장에 있던 글귀를 편지에 옮겨 적고 나니, 미열이 전해줬던 여운에 지친 상태였다. 새끼손가락이 흑심에 범벅된 사실도 잊은 채 나는 침대에 스르르 눈이 감기듯 누워 잠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그 편지를 다시 읽어보았다. 야밤에 뭐 했나 싶었지만 이내 내가 한 순수한 바보짓에 작은 흐뭇함을 입가에 머금으며 흘겼다. 어제의 나는 그녀를 후회 없이 사랑했다. 이 편지는 그 후회 없음의 증거이다. 이 사실에 더 필요한 건 없었다. 그리고 오늘이 왔다.
데이트에 앞서 나는 편지를 슬며시 챙긴다. 민망하고 오그라드는 표현들 밖에 없었지만, 흑심으로 범벅이 된 약지를 보고 그대로 전해주기로 했다. 어제의 나는 정말 바보였지만, 사랑스러워서 자랑하고 싶었다. 편지라는 것은 쓰는 사람은 읽는 사람만을 생각하고 읽는 사람은 쓴 사람만을 생각하게 한다. 그녀 역시 내 바보 같은 면을 이해해 줄 거라 믿는다. 러브레터는 그렇게 활시위를 떠난 에로스의 화살처럼 과거를 가로질러 사랑이란 선물을 약속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