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의

글도둑

by 글도둑

취하고 싶다. 아니, 취해야만 했다. 홀로 돌아온 내 방 안에는 저녁의 찌는 듯한 더위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장 옆에 있는 병을 집어 들고 투명한 유리잔에 1/3 정도 따랐다. 냉장고를 뒤적거려 얼음을 가득 채웠다. 유리잔을 손목으로 돌려 한번 휘젓고 입에 가져간다. 진한 오크 향이 코를 스쳐지나 목구멍으로 흐른다. 텅 빈 뱃속에서 뜨거운 기운이 요동치다 코로 다시 뿜어져 나온다. 스멀스멀 올라오는 뜨거움에 그때 생각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흐릿한 그녀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이 선명하지 않다. 그녀를 처음 안던 날이 흐릿하게 떠오른다. 그녀가 웃던 표정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귀여운 덧니와 시원하게 올라간 입꼬리, 수줍은 미소. 우리가 왜 헤어졌더라? 아니 그 이전에 우리가 어떻게 만났더라? 우리는 소개로 만났다. 그래, 내가 예전에 같이 일했던 사람에게 소개받았지. 소개해줬던 그녀는 정작 연락이 끊긴 지 오래다. 소개해줬던 그 사람은 이름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이 수면 위로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그 사람은 치워버리자. 지금 내게는 중요한 게 아니니까. 추억이 파문을 일으켰다. 울컥, 감정이 넘쳐흘렀다.


우리가 어떻게 만났더라? 우리가 왜 만났지? 기억을 더듬고 더듬어서 처음 만난 순간을 떠올려봤다. 검은색 코트. 맞다, 겨울이다. 추운 겨울에 그녀도 나도 검은색 코트를 입었었다. 새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워서 나도 모르게 손을 잡았다. 일단 카페로 들어가자며 이끌었다. 그때 그녀의 얼굴은 추위 때문인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추위 때문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던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연신 부채질했다.


그래, 우리는 그렇게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녀는 별것도 아닌 내 농담에 입가를 손바닥으로 가리고 웃어줬다. 나는 내 농담이 먹히는 것 같아 더 신나게 떠들었다. 그러다가 순간 허기가 잔뜩 몰려왔다. 시계를 보니 저녁 시간을 한참이나 넘겼음을 깨달았고 그녀에게 배고프냐 물어봤다. 그녀는 그 수줍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 미소였다. 누군가 나에게 그녀를 왜 만났냐고 물어본다면 그 미소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예뻤냐고 물어본다면 고개를 좌우로 흔들겠다만, 귀여웠냐고 물어본다면 위아래로 끄덕이겠다. 작고 새하얀 손가락이 입가를 살짝 가리고 살포시 짓는 미소는 기분 좋게 홀리는 마력이 있었다. 반달로 휘어지는 눈꼬리와 그녀의 투명한 눈빛에 빠졌었다. 그래, 그 미소, 그 손짓과 눈꼬리에 나는 반했더랬다.


꿀꺽. 한 모금의 시원함이 뜨거워진 목을 식히며 넘어간다. 시원함 위로 뜨거운 기운이 몸속에 똬리를 튼다. 코에서 후욱하고 새어 나오는 기운이 어느새 그녀의 미소를 몽롱하게 지워나갔다. 그녀는 나의 낮은 목소리가 좋다고 했다. 차분한 분위기와 낮은 목소리가 유쾌한 농담과 짓궂은 장난기가 섞일 때를 좋아했다. 그녀는 내 장난을 받아줬고 나는 그녀를 웃기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근데 왜 이렇게 됐을까. 내가 뭘 잘못했을까. 허벅지에 눈물이 떨어졌다. 회색빛 바지. 그녀가 사줬던 옷이 얼룩진다. 하염없이 문질러보다 그 순간이 떠올랐다. 우리가 처음 서로를 오해한 그때도 이 바지를 입고 있었다.


연갈색 눈동자. 그녀의 눈동자에 비치는 웃는 내 모습. 내가 원래 이렇게 해맑았던가. 아니, 그녀와 만날 때면 늘 웃게 되었다. 웃지 않았던 적이 없었다. 우리는 유머 코드가 상당히 잘 맞았다. 서로가 종종 장난을 치고 웃고 삐지고 달래기를 반복하며 웃고 또 웃었다. 그토록 웃음 많던 우리가 서서히 웃음이 잦아들던 때는 만난 지 일 년을 훌쩍 넘긴 그즈음이었다. 오해와 함께 찾아온 권태기는 우리 사이 차갑게 식혔다. 그때부터 서서히 싸우고 다시 화해하기를 반복했다.


마지막에 싸웠던 건 뭐 때문이더라. 싸웠던 이유도 녹아버린 얼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저 헤어지고 혼자 술 마시는 내 모습만 유리 비쳤다. 잔에 달그락거리는 얼음을 입안에 넣었다. 얼음을 혀로 이리저리 굴리자 차가운 냉기에 몽롱한 정신이 살짝 돌아왔다. 그래, 처음엔 연락 문제였다. 처음에는 연락이 너무 없다고 그다음에는 너무 단답이라고, 그 이후에는 성의가 없다며, 그리고 애정이 식었냐며 오해에 이자가 붙었다. 애정도 표현하고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못 받은 애정에 이자가 붙어서 빚이 쌓이면 부채가 되어버린다는 걸 왜 몰랐을까.


한숨과 함께 내 잘못이 흩어졌다. 숨에서 향기로운 알코올 향이 맴돌았다. 잔을 다시 들자, 나처럼 덩그러니 혼자 남은 얼음 한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투명한 잔에서 냉기와 함께 물방울이 떨어진다. 내 뺨에선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허벅지가 검게 물들어갔다. 잔에 다시 금빛이 도는 갈색 액체를 채워 넣었다. 공허를 채우기 위해선 더 마셔야 했다. 이상하게도 취할수록 이성은 흐려지는데 그녀의 얼굴은 또렷하다. 병을 내려놓고 왼손으로 잔을 움켜쥐었다. 오른손에는 무거운 머리를 받치려고 턱을 받쳤다. 푸우, 눈을 감았는데 그녀가 왜 눈에 선한 걸까.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서늘한 액체가 몸을 타고 내려가자 뜨거운 기운이 몸을 타고 올라와 정신을 툭 툭 쳤다.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용기가 나지 않아 여태 말은커녕 연락조차 못 했다. 첫 기념일에 써줬던 편지를 받고 뛸 듯이 기뻐하던 그녀가 떠오른다. 그런 모습을 보고도 나는 왜 편지를 자주 써주지 못했을까. 그녀를 위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편지지와 편지봉투를 고르고 또 골랐는데. 문득 생각이 나서 서랍을 열어봤다. 안 쓰는 카드 지갑, 핸드크림, 헤어지고 던져둔 반지 밑에 편지지가 보였다. 아직 잔뜩 남아있었다. 나에게 화가 나서 거칠게 잔을 쥐고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향도,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씁쓸한 끝 맛이 머리를 찡하게 울렸다. 몽롱한 기분에 의식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머리를 받치던 손이 미끄러졌다. 툭 하고 떨어졌던 고개를 반사적으로 치켜들었다.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꿈속이란 걸 깨달았다. 아직도 생생한 마지막 그녀와의 만남으로 돌아와서다. 하필이면 그녀와 헤어졌던 그때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이 순간을 많이 후회하고 있다는 걸까.


카페에서 우리는 시원한 음료를 시켜놓고 얼음이 다 녹아서 둥둥 떠다닐 때까지 어색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색하면서도 묵직한 침묵은 나를 내리눌렀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그녀는 팔짱을 끼고 창문 밖을 쳐다봤다. 나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때 나는 무슨 말을 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꿈속에서 나는 그때와는 달랐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나에게 들리지 않았다. 꿈속에서의 나를 지켜볼 수만 있었다. 그녀는 나를 노려보다 살짝 웃음을 터트리곤 다시 정색했다. 내가 말을 할수록 그녀의 표정은 풀어졌고 곧 팔짱을 풀고 웃음 짓기 위해 입가에 손을 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우리의 오해를 서서히 풀고 있는 듯했다.


그녀가 어떤 대답을 하는지도 들리지 않았다. 다만 늘 다시 듣고 싶었던 웃음소리가 귓가에 너무나 선명하게 들렸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나 그리웠던 탓일까, 꿈속의 나는 그녀를 웃기기 위해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녀의 웃음은 나를 미소 짓게 했다. 따스한 웃음에 우리의 오해가 녹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와 그녀가 좋아하던 식당으로 갔다. 수제 버거, 감자튀김 대신 샐러드, 제로 코카콜라. 우리는 서로 다른 버거를 시켜서 반을 잘라 나눴다. 내가 그녀를 다시 만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다. 그 가게에 가면 그녀는 늘 살찐다며 탄산음료를 제로 코카콜라를 시켰고 감자튀김은 샐러드로 바꿨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늘 샐러드보다 샐러드드레싱이 더 칼로리가 높으니 드레싱이 안 묻은 샐러드를 먹으라며 장난쳤다. 그녀는 또 이런 장난치냐고 지겹지도 않냐고 물어봤고 나는 원래 이런 사람인 거 모르고 만났냐며 되물었다.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내 버거 위에 반이 잘린 방울토마토처럼 생긴 매미를 올려주었다.


매미? 하고 나는 눈을 번쩍 떴다. 사레가 들려서 컥컥 대며 물을 찾았다. 책상엔 얼음이 다 녹아서 1/3쯤 차있는 잔이 놓여있었다. 역한 알코올 향을 무시하며 목을 축이자 사레가 잦아들었다. 창문 밖에서는 자신의 짝을 애타게 찾는 매미의 울음소리가 강렬하게 퍼지고 있었다. 목이 터져라 울어대는 매미에게 행운을 빌면서 창문을 쾅 닫고 다시 침대에 걸터앉았다. 책상엔 반쯤 비워진 병이 열린 채 놓여있었다. 마개를 찾아서 다시 닫고서 빛이 안 드는 책장 속으로 밀어 넣었다. 꿈속에서 들었던 그녀의 웃음소리가 너무 선명했다. 고개를 흔들어 그녀의 목소리를 털어냈다. 그리웠지만 다시는 들을 수 없는 그 소리. 선명해서 진짜 들은 것 같은 그 웃음. 순간 섬뜩한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주머니를 뒤져서 스마트 폰을 찾았다. 주머니에 없다. 침대를 찾아보자 베개 옆에 던져진 검은색 기계가 보였다. 얼굴을 한번 쓸어내리며 한숨을 내뱉었다. 제발, 제발이라고 중얼거리며 통화기록을 열었다. 그곳에서는 내가 잊은 줄 알았던 낯익은 전화번호가 23분 36초라는 기록이 적혀있었다. 손에 들었던 걸 집어던지고 베개에 얼굴을 처박았다. 그러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세수를 하러 갔다. 세면대 앞에서 초췌해진 얼굴이 보인다. 제멋대로 자란 수염과 살짝 부은 얼굴. 찬물을 잔뜩 받아두고 수도꼭지를 잠갔다. 시원한 물속에 머리를 담그고 악을 내질렀다. 뽀글거리는 물거품이 소리를 잡아먹고 차가운 물이 뜨거워진 얼굴을 식혔다.


시원하게 소리를 지르고 침대에 앉아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였나 차분하게 생각해봤다. 선명한 웃음소리만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그녀가 웃었을까. 기억나지 않았다. 한숨을 토해내려던 그 순간, 짧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내던진 스마트 폰을 찾아내자 시리도록 푸른빛이 번쩍거렸다. 그녀일까? 떨리는 손가락으로 화면의 패턴을 그렸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면서. 그녀가 웃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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