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_결심

by 글도둑

난 내가 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을 지독하게 겪어보니, 이럴 바에 현실을 발판 삼아 꿈을 쳐다보고 싶어 졌다.



- 회사에 있는 은행은 3가지였다. 새마을금고와 경남은행, 그리고 국민은행. 나는 국민은행에서 퇴직금을 위한 IRP통장을 만들었다. 통장을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조금 오래 걸렸다. 은행원이 친절하게 건네준 서류를 작성하고 내밀면 초록색으로 물든 통장 하나가 내 손으로 돌아온다. 이 통장에서 내가 3년 9개월 동안 회사에 헌신한 대가로 받는 퇴직금이 들어오는 것이다. 통장을 받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지금 나의 나이에 사직원을 작성하고, 퇴직금 계좌를 만들고, 회사를 나오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1. 결심

전역하고 복직하기 전, 우리 회사에 대한 안 좋은 뉴스들이 TV와 인터넷을 도배했다. 처음에는 새로운 사장이 부임하면서 벌이는 ‘빅 베스(big bath)’인 줄로만 알았다. 전임 사장이 쌓아놓은 먼지들을 털어내면서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새롭게 출발하는 것 말이다. 보통 사장이 처음 부임하게 되면 으레 있는, 그런 일로 보였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아마 새로 부임한 사장도 놀랐을 것이다. 분명 먼지만 털고 깔끔하게 시작하려 했을 것이다. 그런데 먼지를 닦아내자, 시한폭탄의 붉은 계기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더군다나 전임 사장이 벌려놓은 사고가 꼬리를 물고 터졌으니 말이다.


군대에서 책을 읽었다. 정말 많이도 읽었다. 내가 책을 좋아한다는 것과 글을 쓰는 걸 좋아한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책을 읽고 글을 조금씩 쓰면서 취미생활로만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걸로 밥 벌어먹기는 불가능해 보였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꿈을 버렸었다. 할 수 없다고 여겼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회사에서 열심히 돈을 벌어서 북카페를 하나 차리고 싶었다. 퇴근하고 가서 편하게 책을 읽고 글을 쓸 수 있는 나만의 카페를 만들 생각이었다. 꿈을 버리고 현실을 선택했다.


그런 불안한 상황에서 나는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는 희망퇴직과 경영악화로 우울한 분위기만 감돌고 있었다. 거기에 유가가 떨어지고 분식회계 의혹까지 불거지자, 많은 이들이 회사를 등지고 떠나가기 시작했다. 연말에 성과급을 주식으로 주고, 그다음 해 4월에는 분식회계로 인한 주식 거래 정지와 상장 폐지설이 나돌았다. 대한민국의 조선업은 위기였고, 우리 회사는 난파되고 있었다.


그중에서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은 ‘임금 반납’이었다. 받고 있는 월급에서 세금을 떼고 다시 회사가 내 돈을 뺏어갔다. 마음에 남아있던 조그마한 ‘충성심’이 ‘복수심’으로 바뀌는 걸 느꼈다. 더군다나, 회사의 경영상태가 악화되면서 내가 하는 업무에 대한 불만이 쌓여만 갔다. 난 설계를 하고 싶었다.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저 빈 곳에 나를 욱여넣었다. 그것도 동기가 퇴사해서 비어버린 자리로 말이다. 그곳에서 나는 일과 회식, 그리고 학업까지 병행했다. 나름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사실 내 내부는 곯아서 썩어가고 있었다. 주말이 다가오면 회사에서 전화가 오진 않을까 겁이 났고, 주말이 끝날 때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불안감이 먼저 싹텄다. 나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일을 하면서 내가 맡은 것은 '생산지원'이었다. 예산을 편성하고 절감 방안을 기획하고, 다른 부서에게 돈 그만 쓰라고 나무라는 것이 나의 일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회사의 예산'이었다. 회사가 힘들다는 명목 하에 예산은 대폭 삭감되었다. 그걸로 모든 부서에 지원을 해야 했다. 책임은 나에게 돌아왔다. 상사는 나에게 '부서의 실적'을 위해서 일을 하라고 했다. 무조건 쥐어짜서 말이다. 반대로 다른 부서는 최소한의 생산 여건을 보장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돈이 없었다. 신기하게도 낭비되는 돈이 많았다. 윗선에서 내려온 여러 가지 지시들로 들어온 제품을 구매해야 했다. 그럼과 동시에 다른 부서에 지원해주는 수량은 적어졌다. 나는 내가 하는 일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의 회사 생활은 방황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아닌데,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아녔으며, 책임은 나에게 있으나 결정권은 나에게 없었다.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나는 그저 허수아비였다. 총알받이였다.


그렇게 쌓인 장작에 기름을 부어버린 것은 ‘분사’였다. 생산지원부를 협력사로 만들어 아웃소싱을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대기업의 정규 사무직으로 들어온 내게 협력사의 사원이 될 수 도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자,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조심스럽게 부서이동에 대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부서이동도 안되면 때려치우자.'


그런 찰나에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우리 부서는 인원을 더 받아서 몸집을 불릴 거야. 이쪽으로 와서 일 해보지 않을래? 너라면 우리 부서에서 흔쾌히 받아 줄 거야. 어차피 분사하는 쪽으로 따라가려는 생각은 아니잖아, 그렇지?”


그 동기는 품질경영부에 있었고, 그 부서는 인원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 부서에는 이미 많은 동기가 자리를 잡고 일을 하고 있었다. 또한, 하는 업무가 상당히 흥미로운 분야였다. 선박의 품질에 대해서 검사하는 일이었기에 개개인의 능력과 수준도 높아야 했다. 그런 부서에 간다면 더 크게 성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그의 제안에 나는 흔들렸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그 순간부터 이미 결정되었을 수 도 있다. 그는 부서의 인원이 부족해서 내가 아니더라도 인원을 더 받을 거라고 말했다. 나는 기회가 왔다고 느꼈다. 예전에 회사에 입사했던 포부대로, 엔지니어로서 경력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코앞에 말이다. 당연히 손을 뻗어보기로 결심했다. 내게 절대 손해는 아닐 거라는 판단이었다.


“그래, 알았어. 나도 부서에 이야기해볼게. 한번 알아봐 줘.”


부서이동을 해본 적은 없었지만 이것저것 들어서 대충은 알고 있었다. 당연히 ‘보고’가 시작이었고, ‘보고’가 끝이다. 순서는 내 상사에게 먼저 말하는 것이 우선 이였다.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파트원만 회의를 가지는 시간이 있다. 그때, 나는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래, 전달사항은 이 정도까지. 사원들은 별다른 사항 없나? 아니면 할 말 이라던가?”


나는 눈치를 슬쩍 보았다. 아무도 별 다른 사항이 없었기에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 입을 열었다.


“임 차장님, 제가 드릴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음,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해봤는데, 분사가 추진되기 전에 부서이동을 하려고 합니다. 알아보니까, 품질경영부에서 인원이 부족하다고 하더라고요. 그쪽 부서에 있는 동기와 이야기를 했는데, 올 의향이 있으면 반드시 받아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부서로 가보려고 합니다. 제가 이 곳에 들어온 것도 엔지니어로서 경험과 경력을 쌓기 위해서였잖습니까. 지금 하는 업무가 싫지는 않지만 제가 엔지니어로 살아남기에는 많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임 차장이 적막을 깨고 말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말하면 보내주는 게 맞겠지. 일단 더 생각해보고 확정되면 다시 이야기 하자.”


그는 뒤로 미루려고 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데, 나까지 이렇게 나오면 고민거리가 더 많아지리라. 그러나 나는 이미 결심한 상태였다.


“네, 이미 확실히 정했습니다. 저도 많이 생각해보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만일 지금 부서이동을 못하면 영영 못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나? 그럼 부서장님께 보고 드려라. 내도 네가 가는 게 맞다고 본다. 아쉽지만 보내주는 게 맞지. 그래.”


임 차장은 생각보다는 흔쾌히 허락해주셨다. 사실상, 이런 상황에서 붙잡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이렇게 말을 하고 회의실을 나서자, 늘 보던 사무실의 풍경이 어색해졌다. 내가 이곳을 떠나려고 해서 그럴까. 파티션으로 부서마다 나눠진 공간이 길게 펼쳐져있다. 우리 부서는 맨 왼쪽 끝이었다. 우리 부서의 입구와 임원실이 마주 보고 있었다. 내 자리는 임원실에서 가장 멀었던 만큼, 부서장과 가장 가까웠다. 내 자리에 앉아서 마우스를 흔들어 모니터를 켰다. 내 왼편에는 같이 회의를 하고 들어온 임 차장님이 의자에 털썩 앉아 PC를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내 오른편에는 파티션 너머에 프린터와 정수기가 있었다. 그 공간을 넘어가면 꽤나 넓은 부서장의 자리가 있었다. 큼지막한 부서장 파티션에는 6인용 테이블, PC 책상이 있었다. 슬쩍 부서장의 눈치를 봤다. 그리 바빠 보이지는 않았다. 부서장은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무표정으로 모니터를 쳐다보면서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조용히 부서장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앞에 있는 의자에 살짝 앉아 침을 꿀꺽 삼치고 말을 뱉었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 게 느껴졌다.


“윤 부서장님, 잠깐 시간 괜찮으십니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