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_확신

연습을 해보다

by 글도둑

- 내가 내민 서류에 부서장님은 흔쾌히 서명해주셨다. ‘생산지원담당‘이라고 적혀있는 명패 앞을 몇 번이나 어슬렁거렸을까, 상무님이 살짝 기분이 좋아 보이실 때, 열려있는 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갔다. 꽤나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분명 다른 선배들이 부서이동이 안되면 퇴사한다고 이야기를 해놨을 텐데, 과연 진짜 사직원을 가져오면 어떻게 반응하실까 궁금했다. 그러나 내 예상은 빗나갔다. 나는 상무님께 나의 계획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다.


"해외로 나가서 일 년 동안 살아볼 계획입니다. 그다음에 적응이 잘 된다면 해외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싶습니다."


사실 거짓말에 가까웠다. 이미 체코에 있는 면세점 계약직으로는 합격됐지만 내가 생각보다 너무 여유가 없었다. 해외에서 일 년 동안 살아보면서 글을 쓸 생각이었다. 책도 많이 읽고 영어 공부도 하고 말이다. 아직은 불확실했다. 캐나다 워킹홀리데이에 지원해놨지만, 그것도 운에 맡겨야 했다. 목표는 28살에 북카페를 차리는 것이었다. 그전까지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빌어먹을 거제도에서는 '다양성'이 실종되니까 말이다.


"그런 계획이 있으면 나가야지. 그동안 고생 많았어. 잘 해보고."


별다른 이야기 없이 사장님과 본부장님까지 전결 해서 서명해주셨다. 잘될 거라는 덕담과 함께 말이다. 황상무와 악수를 하면서 나는 그의 손을 꽉 쥐었다가 놨다. 고민은 정말 길었는데, 사표를 위한 서류는 딱 하루 만에 정리됐다. 상무님은 우리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으리라. 자기가 부서이동을 보내주지 않아서 내가 퇴사를 확실히 결정하게 되었다고는 추호도 모를 것이다.


4.

한번 뻗어나간 생각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히 퇴사에 대한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멈출 줄을 몰랐다. 부서장님이 우리에게 회사의 비전이나 다른 부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도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생각은 이제 ‘부서이동’에서 ‘어떻게 하면 깔끔하게 퇴사할 수 있을까?’로 변해버렸다. 편안한 집과 고등학교 친구들, 익숙한 길거리가 머리에 계속 떠올랐다. 그렇게 퇴사에 대한 생각이 하루, 하루를 잠식해가고 있을 때 즈음, 어떤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야, 너는 정말로 네 사업을 차리고 싶은 건지, 아니면 회사가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그럴듯한 핑계로 도망치는 건지 모르겠다. 근데, 지금 내가 볼 때 너는 네가 맡은 일이 마음에 안 들고, 회사가 어렵다는 걸 핑계로 도망치는 것처럼 보여. 너는 정말로 하고 싶은 게 있는 거야?’


나는 사업을 하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세계여행이나 다니며 글을 쓰고 책을 읽고 싶었다. 군대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회사에 대한 전망 생각했다. 우리나라 조선업은 미래가 없었다. 중국은 우리나라의 기술력을 따라오는데, 우리는 유럽의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중요한 설계와 장비들은 해외에 의존하고, 값싼 노동력은 중국에게 밀리면서 전반적인 조선업은 이리저리 치이고 있었다. 더군다나 유가 폭락이 이어지면서 해양플랜트는 적자 투성이었다. 당연히, 우리 회사가 많이 수주했던 프로젝트들에서도 적자가 발생했다. 그 여파는 회사는 휘청거림을 넘어서 거의 쓰러지다시피 했다. 내가 맨 처음에 입사했던 회사와 군대를 제대하고 다시 돌아온 회사는 전혀 다른 회사였다.


3달 전, 동기 중 한 명이 퇴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문득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가 멀쩡한 외관만 보고 타이타닉에 승선한 것 같다고. 그래서 연습을 했다. 다름이 아니라 글 쓰는 연습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써서 올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가요?]

우리는 타이타닉에 탑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곤 해. 빙하에게 어깨빵 시도했다가 역관광으로 수장당한 그 타이타닉호, 알지? 명절 특선영화로 tv로 자주 나왔잖아. 그게 우리 같다고. 아니 우리라고.


신기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바다로 살기 위해 몸을 던지지만, 그들이 구명조끼는 입었는지, 구명정을 구했는지는 아무도 몰라. 차가운 바닷물에 얼어 죽기를 바라는지, 기적적인 구조를 바라는 지는도 모른다고. 우리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아니잖아. 디카프리오로 죽을 바에는 아무도 모르는 하나의 엑스트라로 비좁은 구명정에 몸을 욱여넣어서라도 살고 싶다. 난 그렇게라도 살 거야. 그래야 하고, 그럴 거야.

우리는 어떻게 해야 생존할지 아무도 몰라. 타이타닉호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과연 얼마나 기억은 안 나지만, 누군가는 용기 있게 바다로 뛰어들었고 누군가는 인내심 있게 구조를 기다렸지. 자신의 선택이지만 달려있는 목숨이 하나가 아니라서 판단은 흐려지곤 했을 거야. 구명조끼에 구명정, 음식과 물이 있어도 비바람에 휘쓸리면 끝이고, 맨몸으로 바다에 빠져도 육지까지 헤엄치면 살아남을 수 있어. 지금 사회에서 침몰하는 선박에 승선했다는 건 얼마나 위험한 일일까?


우습게도 타이타닉은 그 당시 최고의 호화 여객선이었다지? 그랬기에 충격이 더 컸고, 두려웠지. 심지어 선박에 대한 안전법이 이 사고 때문에 생겼다잖아? 우리도 그랬지. 호화스러운 여객선인 줄 알았고 성공한 정책이라 믿었어. 물론 진실은 지금과 같아. 그때 타이타닉호의 선장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지? 과연 우리의 선장은 어떨까?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바다로 뛰어들지, 인내를 품고서 구조를 기다릴지 결정해야 해.

인생은 타이밍이고, 실전이래. 넌 어떻게 생각해?



그 글에는 다양한 댓글이 달렸고, 몇몇은 그 글에 불쾌해했다. 나는 다음 날, 그 글을 지웠다. 밤에 아무 생각 없이 썼던 글이었다. 그냥 연습 삼아 SNS 쓰던 건데,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줄준 몰랐다. 아직도 회사에 대한 애정이 있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고 신기했지만,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생겼다.


즐겨보던 미국 드라마에 이런 말이 나왔다.


"Loyalty is a two-way street. If I'm asking for it from you, then you're getting it from me."


'애사심'이라는 놈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회사에 왜 목숨 거는지,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른다. 그래도 회사가 그들을 부려먹고 버리지 않기만을 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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