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어릴 적 봤던 영화와 지금 본 영화는 다른 영화가 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동심이 아직 남아있던 시절 봤던 영화였다. 그때는 아무런 생각 없이 아름다운 색감과 독특한 분위기의 신비로운 이야기를 즐겼다. 다 커버린 지금은 영화에 담긴 메시지와 세계관이 잔잔하게 스며들었다.
치히로는 가족들과 함께 어떤 터널을 지난다. 이 터널은 현실과 선계를 이어주는 통로였다. 그리고 이 선계는 지독하고 신비로운 법칙이 있었다. 처음 온 사람이라면 눈 뜨고 당할 만큼 지독한 법칙 말이다.
첫 번째는 음식이다. 이 음식은 일본이 생각하는 신을 반영한 요소다. 800만 신들을 위해 요괴들이 만들어놓은 음식이다. 만물에 신이 깃든다는 개념으로 800만 신을 언급하면서 이 음식을 허락 없이 먹은 죄로 치히로의 가족들은 돼지로 변해버린다.
돼지로 변하는 경우, 자아를 잃게 되며 나중에는 도축당해서 자신이 먹었던 음식이 되어버릴 수도 있다. 실제로 유바바는 어린 치히로를 협박하는 과정에서 도축해서 베이컨을 만든다는 말을 던진다. 이 음식들은 길 잃은 인간을 유혹하여 돼지로 만들고 재료비를 충당하려는 구두쇠 사장, 유바바의 포석으로 보인다.
밤이 되면 아무도 없는 것 같던 거리는 유령들로 붐빈다. 선계는 유령과 요괴 그리고 마녀와 신으로 운영된다. 신기하게도 금화를 비롯한 귀금속이 화폐로 이용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해가 지면 현실 세계와 연결된 통로는 물에 잠기게 된다. 또한 선계는 인간을 배척하는데 선계에 들어선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점차 유령화 된다.
이처럼 투명하게 변하면서 유령이 되며 선계의 음식을 먹지 않는다면 결국 유령이 되는 것으로 유추된다. 치히로는 하쿠가 준 경단을 먹으면서 이를 극복했다. 선계의 음식을 사흘간 먹는다면 인간 특유의 누린내가 제거된다고 한다. 사흘이 넘어가면 인간의 누린내가 사라진다는 점은 선계의 음식을 먹으며 점차 선계의 요괴나 신에 가까워진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작품 속 치히로는 선계에서 3번의 밤을 보낸다. 3일 동안 경단, 주먹밥, 찐빵 등 다양한 음식을 먹지만 사흘 째 되던 날, 치히로는 부모님을 구해서 선계를 떠나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선계에서 도마뱀 구이가 요괴들이 아주 좋아하는 음식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 도롱뇽 구이로 인하여 치히로는 두 번의 고비를 넘긴다. 가마 할아버지는 도롱뇽으로 치히로를 린에게 부탁하고, 린은 도롱뇽 구이의 냄새로 개구리 요괴를 속여 넘긴다. 도롱뇽 구이 덕분에 무사히 유바바의 방에 도착한 치히로.
하쿠는 선계에서 일하지 않는다면 유바바가 동물로 변신시킨다는 말을 했다. 때문에 치히로는 일하게 해달라고 간청한다. 재밌는 점은 마침내 일한다는 것을 허락한 이후 유바바가 하는 말이다.
일을 구하는 자에게 일을 주겠다는 맹세. 유바바는 누군지 모르는 자에게 맹세를 했고 이 맹세 때문에 하쿠는 치히로에게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일을 달라고 말하라 시켰다. 정황상, 유바바가 이 온천탕을 경영하게 됐을 때 맹세한 것으로 보인다. 일을 한다는 것은 온천탕에 소속된다는 것이며 이는 유바바의 보호 아래 놓인다는 것과 다름없다.
이곳에는 법칙이 있다. 일을 구하는 자에겐 일을 준다. 그리고 온 손님은 거절하지 않는다. 작품 속에서 오물 신이라 오해받는 존재는 악취로 인해 다리에서는 돌아가라고 떼를 쓰지만 다리를 건너자 마지못해 손님으로 받는다.
구두쇠 사장, 유바바는 노동자 계약 시 이름을 빼앗는다. 이름을 빼앗아 노동자를 지배하며 이름을 빼앗기면 돌아가는 길을 잊게 된다. 영원히 노동자로 살게 되는 계약이나 다름없다. 실제로 하쿠는 유바바에게 이름을 빼앗기면서 과거의 기억을 거의 다 잊게 된다.
치히로라는 이름을 빼앗긴 센의 세계는 다양한 법칙이 존재한다. 마법이 흐르는 세계에서 센은 사회 초년생을 거쳐서 당당한 사회인이 된다. 인사가 자연스러워지면서 상사에게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요구하는 모습에서 어느새 어엿한 사회인이 보인다. 센이 지내던 선계는 또 어떤 법칙이 있을까 궁금해지는 추억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