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정리하다
- 메일을 보내고 잠깐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 메신저가 하나 도착해있었다.
김 과장 : [안녕하세요, 퇴사 관련 담당자 김 과장입니다. 관련 서류와 준비해서 2시까지 와주시면 됩니다.]
김 과장 : [오시기 전에 미리 전화나 메신저로 연락 주세요.]
류사원 : [네, 감사합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류는 모두 준비가 완료되었다. 나는 의자의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파묻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구나.’
6.
게스트 하우스에 다시 들어가자 급하게 나오느라 보지 못했던 내부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게스트 하우스는 역에서 꽤나 멀리 떨어져 있었고, 매우 구석진 곳에 위치해있었다. 덕분에 값이 꽤나 저렴했다. 당일 특가로 예약했기 때문에 가격은 딱 만원이었다.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과 2층은 객실, 3층은 주방으로 아침을 먹는 곳이었다. 나는 1층에 있는 방으로 배정받았다. 내가 있는 방에는 손님이 나밖에 없어서 편하게 쓸 수 있었다. 방에는 작은 화장실이 딸려있었다. 매우 좁아서 욕조도 없었지만 충분히 마음에 들었다. 기숙사 화장실보다는 컸으니까 말이다.
방에서 나오면 커다란 TV와 TV를 둘러싼 책장과 책이 보였다. 그리고 기다란 소파 하나와 작은 테이블 3개가 일렬로 놓여있었다. 그 뒤편에는 PC 2대가 불빛을 반짝거리며 켜져 있었다. 호기심이 치고 올라와서 2층까지 올라가 봤다. 2층은 양 옆으로 객실이 가득 차 있었다. 계단이 생각보다 가파르고 천장이 꽤나 가까워서 키가 큰 사람은 머리를 조심해야 했다. 3층은 옥상이었다. 옥탑방을 주방으로 개조해놨는데, 아침은 여기서 빵과 계란으로 손님이 직접 해 먹으면 된다고 했다. 잠을 자려고 1층으로 내려가는 길, 내가 부딧칠뻔했던 천장에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한눈에도 묵직해 보이는 등산용 가방을 짊어진 사람이 지도를 보고 있었다. 그 아래에는 영어로 이 게스트 하우스 이름이 적혀있었다. 'Blue Backpackers Hostel'. 나는 그곳에서 잠시 멈춰서 세계를 여행하며 글을 쓰는 모습을 떠올렸다. 참 재밌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일요일 아침, 3층의 주방으로 올라갔다. 여행객으로 보이는 50대 중년의 외국인이 지도를 펼치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나는 토스트기에 식빵을 두 조각 넣고 냉장고를 열었다. 냉장고에는 오렌지 주스와 우유, 그리고 계란이 있었다. 계란을 두 개 꺼내어 프라이팬 위에 깨트려 넣었다. 커다란 머그컵에는 오렌지 주스를 가득 담아 외국인의 옆자리에 두었다. 외국인은 나에게 눈짓으로 인사를 건넸고, 나도 인사를 했다.
"morning."
계란을 토스트 위에 올리고 먹으면서 그와 대화를 했다. 그는 덴마크 사람으로 일본 와 한국을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웃으면서 자신이 여행한 곳을 보여줬다. 서울, 경주, 그리고 부산. 오늘은 이곳을 여행하면서 있다가 다음 주쯤에는 일본 도쿄로 넘어간다고 했다. 그의 옆에는 어젯밤 봤던 그림 속의 거대한 가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맛있는 과자를 찾았다며 나에게 보여주었다. 곡물로 만든 과자였다. 오곡으로 만든 과자. 그가 나에게 하나 권하길래, 감사히 받아서 먹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그와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어 졌다. 낯선 사람에게 말을 붙이는 털털함과 그의 주변에 흐르는 여유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오늘은 일요일이었다. 쉬는 날이자, 월요일의 전날이다. 오늘 하루를 보내면 내일은 또 일하러 가야 했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그에게 즐거운 여행이 되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다시 거제도로 돌아오자, 금세 월요일이 되어 다시 출근했다. 회사에서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럴 때면 사무실을 벗어나 현장으로 향했다. 가면서 생각을 할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말이다. 머리에서는 퇴사에 대한 생각이 슬슬 정리가 되어가고 있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서 하나씩 정리해갔다. 하나, 둘씩 정리를 시작하자 지금 해야 하는 것이 떠올랐다. '글을 쓰는 것'과 ‘외국에서 살아보는 것’이다. 나이에 따라서 가장 하기 힘든 것이 있다면,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살아보고, 다양한 문화와 모르는 것에 대해서 몸으로 부딪쳐보고 깨닫는 것이다. 몸소 직접 체험하고 배우는 것은 머리로 배우고 익히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냄새는 사람을 바꿔놓는다. 좋은 방향이든, 나쁜 방향이든.
그렇게 해서 방향을 정해버렸다. 조사 끝에 나온 곳은 ‘캐나다, 영국’이었다. 워킹 홀리데이를 간다면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곳이 캐나다였고, 영국은 단순한 어학연수의 목적으로 지원할 계획이었다. 더군다나, 캐나다 워킹 홀리데이는 시기가 잘 맞아떨어져서 바로 지원할 수 있었다. 문제는 합격이 랜덤이라는 것과 시간이 조금 걸린다는 것이다. 중간에 놀게 된다면, 폐인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예전에 술자리에서 내 친구가 그런 말을 했다.
“야, 넌 너를 믿냐? 난 나를 못 믿어. 내가 나를 아는데, 유혹과 욕심이 가득한 걸 아는데, 나를 어떻게 믿냐?”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느슨해지면 다시 나사를 조이기 어렵다. 풀려버린 나사를 조이는 것보다 뽑아버리고 새로운 나사를 집어넣는 편이 훨씬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른 정규직이나 계약직을 구해볼 생각으로 다양한 구직정보에 이력서를 써서 넣었다. 해외취업에도 눈을 돌렸다. 다양한 나라에서 일손이 부족했고, 그들은 노동력을 끌어오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꽤 괜찮아 보이는 일, 인턴 기자와 영업원과 같은 걸로 체코와 미국에 이력서를 넣었다. 미숙하지만 영어실력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영어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도 쓰면서 준비를 시작했다. 회사를 떠날 준비를 말이다. 그러면서 두 곳에서 연락이 왔다. 필리핀의 호텔 관리직과 체코의 면세점이었다. 문자가 왔고, 저녁에 화상면접을 보기로 했다.
통화를 마치고 내 업무를 깨작깨작하고 있을 때, 메신저로 연락이 왔다. 분사 추진 때문에 부서이동을 같이 하려던 선배였다. 그도 당연히 부서이동에 실패했다. 그는 메신저로 같은 담당 내에 있는 고졸공채 1기와 2기를 모았다.
김선배 : [이번에 부서이동 안되면 어떻게 할 거야?]
김선배 : [의견 수렴해서 담당 임원에게 전달하면서 부서 이동해달라고 요청드릴 건데.]
류사원 : [전 부서이동 안되면 퇴사하려고요. 아니면 그냥 퇴사....]
이사원 : [전 여기 있을래요. 분사 추진돼도 가급적이면 남는 쪽으로 하려고요.]
한사원 : [전 그냥 퇴사할래요. 그게 더 좋을 것 같아요.]
대부분은 퇴사보다는 부서이동을 하려고 했다. 아무래도 지금 아무런 준비도 없이 퇴사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까 말이다. 나는 우선 부서이동을 한다고 던져놨다. 그러나 사실은 퇴사 쪽에 마음이 더 기울었다. 어처피 우리 담당 임원, 황상무는 무조건 기다리라고 말할 것 같았다. 내 자리는 담당 임원실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 황상무 님이 자리에 오시자, 지금 가서 말씀드려보라고 선배에게 알려줬다. 잠시 후, 선배들은 담당 임원실에 들어갔고, 한참 동안이나 나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