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_정리

여사원들을 정리하다

by 글도둑

- 김 과장도, 이대리도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한번 더 생각 보는 게 어때?’ 혹은 ‘그건 아니다. 차라리 다른 대학교를 가라.’라는 둥의 빈말과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는 말들을 하지 않았다. 회사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인사부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손은 누구보다 많은 퇴직 서류를 만졌다. 쓸데없는 말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다. 퇴사에 대한 나의 생각이 너무 단단하게 굳었기 때문일까. 과장님은 이렇게 말했다.


“그래도 이런 인재가 퇴사해서 아쉽네. 어딜 가서든 잘 해라. 이렇게 만든 회사를 대신해서 미안하다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이 서류는 최대한 빨리 처리해줄게. 퇴사 관련된 사항은 메일로 전달해줄 테니까 걱정 말고. 자, 그럼 다른 궁금한 건, 없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말하고 싶은 것도, 궁금한 것도 없었다. 미련을 버린 지 오래다.


“그래, 그럼 여기 있는 대리랑 이야기마저 하고. 아, 그리고 퇴직금은 조금 늦게 들어갈 거야. 너도 알겠지만, 지금 희망퇴직 때문에 많이 밀렸거든.”


그는 그렇게 먼저 자리를 일어섰다. 아마도 옆에 있는 이대리와 마지막으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고 가라는 배려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대리님과 함께 내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지낼 것인지. 그러나 워킹 홀리데이나 해외취업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글에 대해서는, 책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했다.


9.

조금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회사를 가보니 조용했다. 일은 여전히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나는 메신저로 박사원에게 대화를 걸었다.


류사원 : [18, 18, 18]

박사원 : [뭐고? 니 내한테 욕 하나?]

류사원 : [아니요, 제 퇴사일인데요.]

박사원 : [뭐? 퇴사하나? 부서 이동은 안된대?]

류사원 : [응, 나가려고. 부서이동 못하게 계속 잡아놓으니까 미련이 점점 사라진다.]

박사원 : [임 차장님께는 말했나?]

박사원 : [부서장님은?]

류사원 : [슬슬 말씀드려야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며 일을 하던 중, 휴식시간이 가까워졌다. 회사에서는 오전 10시, 오후 3시마다 쉬는 시간을 정했지만, 사실 우리 부서에서는 쉬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때, 한쪽이 많이 소란스러웠다. 여사원들이 우르르 회의실로 몰려갔다. 대부분은 경리직 여사원이었다. 경리로 채용된 여사원들, 그중에서 회사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서 정규직으로 전환된 여사원들도 있었다. 나는 회사가 여사원들을 대상으로도 무슨 짓을 하는지 궁금했다. 혹시 권고사직은 아닐까.


여사원들의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나는 현장에 볼 일이 생겨서 잠시 밖으로 나갔다. 내가 맡고 있는 업무는 전사에 소모품을 지원하는 것이다. 많은 곳에서 지원 요청이 들어온다. 더군다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손대려고 하는 업체들이 많았다. 귀찮고 짜증 나지만 함부로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누군가의 청탁으로 물건을 납품하려는 업체 사람을 만나고 와야 했다. 최대한 짧게 이야기하고, 회의를 핑계로 도망쳐 나올 생각이었다.


업체에서 가져온 샘플은 연마석이었다. 선박을 건조하는 과정에서 녹이 핀 곳을 제거하고, 쓸모없는 부위를 절단할 때 필요한 제품이었다. 물론 연마석은 예산에서 꽤나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때문에 다양한 제조사의 제품이 들어오고 있었다. 강도 별로, 작업 구역별로 말이다.


“지난번에 메일로 보내드린 자료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사실 저희 업체가 경쟁사보다 품질이 낮진 않거든요. 여기 자료 보시면, 강도도 더 좋고요.”


앞에서 연마석 업체의 이사가 나에게 제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었다. 내 귀에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이 제품을 써야 할 필요도, 샘플 test를 해야 하는 이유도 없었다. 이런 일들이 사실 나에게 오면 안 된다. 그저 윗선에서 내려왔다는 것이 문제였다. 누군가의 부탁으로 줄을 타고 내려온 요청사항. 이런 제품들이 회사에 공식적으로 들어오려면 우리 부서보다는 조달 부서와 관련 구매대행업체와 협의가 이미 마친 상황이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부서, 그것도 사원에게 이런 요청이 온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다. 그러나 회사 생활을 하다 보면, 안돼도 돼야 하는 일이 있고, 되면 안 되는 일이 있기 마련이다. 이번 일은 안돼도 되도록 만들어야 했고, 그것은 고스란히 내 몫으로 돌아왔다.


“일단 샘플 Test는 한번 해봐야죠. 우리도 자료에 대해서 믿고 바로 진행하면 좋지만, 업무 절차상 회사에서도 확인이 꼭 필요해서요. 게다가 제품이 들어오려면 회사에 업체 등록이 되어있어야 하고, 조달부 쪽에도 이야기를 해야 해서 시간이 조금 걸릴 듯싶습니다. 일단 샘플 test 먼저 거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제가 11시에 또 회의가 있어서요.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나는 점점 더 길어지려는 제품 설명을 중간에 살짝 자르고 들어갔다. 어쩔 수 없었다. 그게 내 일이었다.


“아, 네, 그럼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나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그는 내게 잘 보이려고 애쓰고, 공손하게 행동했다. 나는 그럴수록 더 공손해졌다. 그래도 그는 ‘이사’였고 나는 ‘사원’이었다. 내가 그를 함부로 대할 위치가 아니었다. 30분가량의 미팅을 마치고 다시 건물로 돌아왔다.


터벅, 터벅 4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스마트폰을 켰다. 인터넷 뉴스를 검색하는데, 회사에 대한 소식은 여전히 늘 절망적이기만 했다. '해운, 조선 업계의 불황'이 늘 한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우리 회사에는 희망이 없는 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오르는 와중, 여사원들이 밖에서 훌쩍이며 통화를 하고 있었다. 2층에서도, 3층에서도, 4층에서도.


“언니, 울지 마요, 언니......”


자리에 가던 중, 강사원은 훌쩍였고, 옆에서 있던 박사원은 손에 휴지를 들고 달래주고 있었다. 눈치로 보건대, 역시 그 소집은 권고사직 같았다. 채권단이 고용한 우리 회사를 살리기 위해서 수술에 들어갔다. 우리의 이곳, 저곳을 자르고 도려내고 있었는데 그 부위 중 하나가 바로 '여사원'이었다. 한참 후에 메신저를 통해서 박사원에게 물어보니, 전말은 이랬다.


“그동안 고생 많았으니, 집에 가서 쉬어라.”


간단명료한 말이었다. 경리직 여사원들에게도 희망퇴직을 받는다는 이야기였다. 사실상, 권고사직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희망퇴직 대상은 10년 차 이상 과장부터 3,000만 원, 차장 5,000만 원, 부장 8,000만 원까지 였다. 여기서도 근속연수에 따라서 최대는 8,000만 원까지 받을 수 있었다. 생산직도 동일했지만 거의 신청하지 않았었다. 물론, 최근에 회사의 농간으로 잔업을 금지시켰을 때, 대폭 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여사원들에게 과장급 대우를 해준다고 한다. 최대 3,000만 원까지 희망퇴직금을 준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자,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게 그런 기회가 주어진다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날 자신이 있었다. 물론, 가정이 있고, 아이들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르겠지만 말이다. 갚아야 할 빚과 책임져야 할 자녀가 있으면 고작 그 돈으로 무엇을 할까 싶다.


그러나 그런 돈일지라도 나에게는 너무나 탐나는 금액이었다. 회사는 점점 과감하고 빠르게 일을 처리하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오로지 인사와 임원들만 그 ‘일’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우리에게는 추진되는 당일이나 돼서야 알려준다는 것이다. 회사는 정책을 팬케이크 뒤집듯이 휙 휙 뒤집고 있었다.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말이다. 아직도 조금씩 훌쩍이고 있는 강사원의 옆에 슬며지 부서장이 자리 잡았다.


"어쩔 수 없는 거지. 사실 나도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데....."


안쓰러워 보였는지 나름 위로를 하려는 부서장이었다. 다만, 그 위로가 전혀 도움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말이다. 심지어 강사원은 아들을 출산하고 복직한 지 5개월도 채 안됐다. 출산휴가를 다녀와서 주부사원으로 일을 다시 시작한 지 얼마 안돼서 회사가 그만두라고 통보해왔다. 그걸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은 우리 부서에 아무도 없었다.


우리 층에서 조금씩 소리가 들렸다. 울음을 참는 소리, 울음을 달래는 소리,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 남편과, 가족과 통화하며 울음을 억누르는 소리. 그 소리들이 뒤섞여서 우리 층을 흔드는 귀곡성이 되었다. 내 자리에 앉아서 PC를 마주 보고 마우스를 손에 쥐자, 차가운 메스를 잡은 것처럼 느껴졌다. 나도 회사에 계속 남게 된다면, 언젠가는 칼자루를 쥐게 될 날이 올까, 아니면 저 칼에 잘리는 날이 올까.


역시, 그전에 내가 도망치는 것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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