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_의혹

비전에 대해서 생각하다

by 글도둑

- 이대리와 인사를 나누고 건물 밖을 나서자 유난히 푸르른 하늘이 보였다. 나의 퇴사가 가을과 함께 다가왔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다. 하늘은 맑고 높았다. 그 하늘을 가리면서 다양한 깃발이 펄럭이고 있었다. 대한민국 국기와 무재해를 기원하는 녹색 깃발, 그리고 회사의 로고가 큼지막하게 박힌 깃발까지. 다시 우리 부서가 있는 건물로 내려가는 길, 노란 은행잎이 길에 가득 쌓여있었다. 오를 때는 가파른 언덕이지만, 내려갈 때는 편한 내리막 길이다. 마치 회사에 입사하는 것과 퇴사하는 것처럼, 나는 어렵게 올라와서는 쉽게 내려가고 있었다. 아래로 쭉 뻗는 길에는 트레일러를 실고 달리는 화물차와 셔틀버스가 지나가고 있었다. 뿌연 매연을 뿜어내면서 말이다.


10.

한 차례의 폭풍이 지나간 이후, 대부분의 여사원들은 곧장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여사원들은 다음 달까지 근무가 연장되었다. 그외 사람들은 다른 희망퇴직자들과 함께 이번 달 31일 부로 회사를 나갔다. 그들이 있었던 자리에 떡 하니 놓여있던 컴퓨터는 한동안 그 자리에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듯 했다. 그러나 그런 컴퓨터를 가져간 것은 PC를 담당하는 부서였다. 그들은 수레를 가져왔고, 컴퓨터를 싹 치워버렸다. 몇년동안이나 그 자리를 지키던 사람들의 흔적은 고작 몇분사이에 사라졌다.


슬슬 이야기를 꺼내야 할 타이밍이라고 느꼈다. 이제 곧 분사가 추진 될 것 같았다. 분사가 추진되면, 퇴사하는 절차가 더 귀찮아질 게 뻔했다. 더군다나 소문으로 분사 추진할 돈이 없어서 올해는 못한다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회사는 추진하는 일들은 늘 소문으로 먼저 알았다. 공식적으로 진행하는 것이 드물었다. 문제를 무시하고 모른 척 하는 것이 쉽고 편할 줄 알지만, 사실은 언제나 당당하게 맞서는 것이 더 좋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른 아침, 잠시 현장에 다녀오니 부서장이 자리에 없었다. 이번 기회에 말씀 드리려고 마음을 먹었다. 지난번에 임차장에게 말했던 이후에도 부서이동에 대한 것은 도통 진행이 되지 않았다. 임차장 또한 자신의 자리가 위태롭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부서장에게 강하게 어필하지 못했다. 그걸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회사에 더 있을 마음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을 뿐이였다. 부서장이 언제쯤 올까 기다리면서 메일을 보는데,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랜만이야, 잘 지냈나?”


반백으로 물든 머리에, 얇고 둥근 금색 안경테를 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이부장이 있었다. 평소에 조달부서와 자주 업무연락을 하는데,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시던 분이였다.


“아, 안녕하십니까, 잘 지내셨어요?”


나와 함께 일을 하던 조달부서에서 조달기획부로 옮기면서 최근에 연락을 자주 못드렸었다. 자동차를 바꾸면 자기가 타고 다니던 차를 나에게 주고 싶다고 할 정도로 나를 아끼셨던 분이였다. 아쉽게도 그의 아내가 지금 회사 사정상 새차를 사기는 어렵다고 반대를 해서 실패했지만 말이다.


“커피 한잔 드릴까요?”


나는 정수기 앞으로 가서 믹스커피와 종이컵 하나를 집어 들었다. 이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믹스커피를 한잔만 달라고 했다. 그러고는 내 왼쪽에 있는 임차장에게도 말을 걸었다.


“임차장, 커피 한잔 할까?”


곧 이어, 임차장도 자리에 일어나 부서장 자리 옆에 있는 회의 테이블에 앉았다. 나는 커피를 세잔 타서 테이블에 앉아있는 이부장과 임차장에게 드리고는 빈 자리에 앉았다. 이부장은 늘 웃는 표정이였다. 그는 웃으면서 ‘이제 나도 집에 쉬어야지.’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 사실 이런 상황에서도 잘 살아남았다. '부장'정도 되려면 속에 능구렁이가 몇 마리 있어야 하나보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말이야, 이미 90%정도 계약이 완료 된 프로젝트가 두 개정도 있다고 하던데. 지금은 회사가 힘들지만, 구조조정 잘 끝내고, 유가 조금만 오르면 금방 튼튼한 회사로 변할 수 있을 것 같아. 또, 지난번에 뉴스 보니까 18년도부터는 컨테이너선, 20년도에는, 뭐였더라, 환경규제가 심해져서 신규 선박 발주가 늘어날 거라고 하던데. 그럼 좀 괜찮아지지 않겠나?”


이부장은 희망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 '희망'에는 많은 희생이 필요해 보였다. 회사를 위해서 떠나는 사람뿐만 아니라, 떠난 사람들의 몫까지 남은 사람이 일을 더 해야 한다. 거기에 임금은 삭감되고 내년에는 한달 무급휴가까지 거론되고 있는 시점이였다. 가족이 있는 사람들은 알바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할 판 이였다. 임차장은 그런 '희망'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야, 그렇죠, 우리 회사가 해양 프로젝트만 정리되고 적자나는 호선만 인도하면 괜찮아 질 겁니다. 몇년만 고생하면 되겠죠. 근데, 그 몇 년 동안 살아남을지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분명 어떤 위기 상황이든 희망은 있다. 하지만 그 희망을 쥐고 이끌어 가야하는 사람이 없다. 전부 녹슬어서 삐걱대고 있는데, 오직 앞만 바라보고 엑셀을 밟고 있었다. 교통사고를 피할 방법이 과연 있을까. 희망적인 소식은 고작 자동차 라이트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수준이였다. 실제로는 엔진이 문제였는데.


한잠을 수다를 떨던 두 남자는 곧 부서장이 오자,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멀리서 부서장이 오는 모습을 보고 이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그럼 다음에도 살아서 봅시다.”


이부장과 임차장이 자리를 뜨자, 나는 자리에 일어나서 부서장의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를, 희망적인 소식을 들어도 나에게는 이미 미련이 없었다.슬슬 이야기를 할 때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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