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영화, 봄날은 간다

by 글도둑

“라면 먹을래요?”


우리가 알고 있는 대사와는 조금 다르다. 그러나 사용하는 상황과 의미는 여전하다. 라디오 PD인 은수는 사운드 엔지니어인 상우에게 라면을 권한다. 말 그대로 라면만 먹고 가는 사람은 없으리라 믿는다. 그들은 너무나도 쉽게 라면을 먹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봄 날은 순식간에 지나가버린다.


‘봄날은 간다’는 2001년도 작품이다. 탁하고 접히는 폴더폰과 지하철이 아니라 버스와 기차만 보이는 2001년도. 그때도 여전히 사랑은 달콤하면서 쓴맛이 느껴진다. 은수는 라면만 먹고 싶었다. 정갈하고 손이 많이 가는 요리가 아닌 라면 말이다. 이미 이혼을 한번 경험한 그녀는 만나는 사람 있으면 데려오라는 상우 아버지의 말에 ‘나 김치 못해’라고 답한다. 상우는 ‘내가 할게’라고 답하지만 그들의 사이에서는 이미 삐걱거리는 소리가 난다.


그들은 라면이란 단어로 암묵적인 만남을 시작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에게 알리거나 공식적인 연애로 발전하지 않는다. 은수는 방송국 직원에게 아는 사람이라고 그를 소개한다. 상우는 친구에게 ‘좋아하는 사람’이라고만 한다. 아버지의 손주 이야기에 잘 먹던 삼겹살을 두고 컵라면을 먹는다. 그들은 직접적으로 ‘사귀자’ 혹은 ‘사랑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랑’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사랑이 끝날 때만 등장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그때 등장한 사랑은 ‘헤어지자’라는 말과 함께 퇴장한다. 그리고 시작되는 구질구질한 집착과 미련이 실연을 겪은 이들의 가슴을 쿡 쿡 찌른다. 그들의 결별은 오로지 그들만의 것이었다. 결혼을 위해 가족을 소개해주지도, 주변 직원들에게 남자 친구라고 소개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연애했을지는 몰라도 사랑을 했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상우는 혼자 사랑했을지도 모른다. 은수는 사랑보다는 라면에 가깝다. 외로움을 달래줄 간단하고 편리한 방법 말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상우와 함께 라면 먹는 사이임에도 다른 남자를 만난다. 방송국에서 만난 음악 평론가와 함께 술도 마시고 같이 여행도 간다. 그사이 걸려온 상우의 전화를 무시하면서.


시간이 흐르고 종이에 베인 손가락을 지혈하기 위해 머리 위로 손을 들던 그녀는 상우를 떠올린다. 그리고 헤어진 연인에게 또다시 ‘같이 있자’고 말한다. 여전히 사랑을 잊지 못했던 상우는 거절하고 울먹인다. 사실은 혼자 사랑했음을 깨달으면서.


우리는 여전히 ‘라면 먹고 갈래’를 은유적인 표현으로 사용한다. 헤어지기 아쉬운 여자가 보통 사용하곤 한다. 직설적으로 말하기 부끄러우니까.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점이 있다. ‘라면’은 ‘사랑해’가 아니다 ‘사귀자’ 또한 아니다. 그저 함께 하룻밤을 보내자는 신호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은수는 그저 상우에게 라면을 먹자고 권했을 뿐이고 상우는 동의했을 뿐이다. 정식으로 사귀는 게 아닌 사이. 그러나 헤어지자고 말할 수는 있는 애매한 사이. 그 오묘한 사이에서 상우는 상처 받고 괴로워한다.


영화는 봄이 얼마나 빠르고 쉽게 지나가는지 두 사람의 만남을 통해 보여준다. 적은 분량의 대사를 통해서 영화의 흐름은 두 사람의 행동에 집중된다. 함께 소리를 녹음하고 밤을 보내며 흘러가는 시간을 느낀다. 너무나 쉽게 만난 그들은 그 이상으로 쉽게 헤어진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한 대화도 없다. 딱 한번 화냈던 상우가 떡볶이를 사 왔을 때는 그의 옷가지가 정리된 가방만이 덩그러니 있었을 뿐.


사랑과 연애에는 대화가 빠질 수 없다.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고 존중하고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쉬운 만남은 속을 터놓는 대화가 없다. 상우는 담담하게 받아들일 뿐이고 은수는 늘 그렇듯 라면을 요구했을 뿐이다. 그 둘의 목적지가 달랐기에 그 둘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 사이였다. 영화는 그렇게 끝난다.


‘라면 먹을래요’는 SNL이라는 프로그램에서 ‘라면 먹고 갈래?’라는 대사로 쓰였다. 조금은 다르지만 의미는 똑같았다. 그 뒤로 ‘라면 먹고 갈래’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은유적인 표현으로 쓰인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사귀자 라는 감정 표현이 아니라 함께 밤을 보내자는 의미로 말이다.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비슷한 대사가 똑같은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이 신기하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라면’과 사랑의 차이에 대해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상우처럼 상처 받지 않기 위해서.


라면에 대한 상우의 울분이 드러나는 장면이 있다. 잠깐 나갔다 온다는 상우의 말에 은수는 얼른 돌아와서 라면이나 끓이라고 답한다. 일이 있다는 상우의 말에 그녀는 이렇게 대답한다.


“무슨 일? 내가 모르는 일도 있어? 또 어디 가서 술이나 마시려고 그러지 뭐.”


“은수 씨, 내가 라면으로 보여? 말조심해!”


작품 속에서 상우와 은수를 이어준 것은 라면이었다. 가벼운 관계와 연애를 만들어준 라면. 라면으로 시작했던 관계는 라면으로 흔들린다. 가볍기에 그들의 관계는 더 크게 흔들렸다. 연애 그 이상을 바라는 상우에겐 라면이 걸림돌이가 되어버린다. 그 이후에 라면은 혼자 먹는 컵라면으로 등장한다. 같이 끓여서 먹던 라면이 아니라 혼자 소주 한잔 곁들이는 고독한 컵라면. 그들 관계에서 긍정적이던 라면이 부정적이게 된 순간이다.


라면 먹자는 말에 어색하게 집 앞에서 기다리던 남자는 이제 라면을 싫어하게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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