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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도둑 Apr 29. 2022

9,600

O 블렌드

에스프레소를 위한 블렌딩을 만들었다. 처음에 생각했던 블렌딩이 맛이 없어서 한번 싹 버리고 다시 잡았다. 덕분에 재료값으로 돈을 날렸다. 아직 미숙하지만 몇 번의 수정을 거쳐서 에스프레소 블렌드가 나왔다. 이름은 올드맨이었다. 브랜드 이름을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따왔으니 가장 클래식하고 보편적인 맛의 커피는 노인이 되어야 했다. 친구들에게 시음을 권해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는 올드맨이 좋아'라고 말했다가 이상하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알파벳만 따오기로 했다. O 블렌드.


O 블렌드는 과테말라, 라오스, 브라질을 강하게 볶아서 섞었다. 견과류 같은 고소한 단 맛과 다크 초콜릿 같은 쌉싸름한 끝 맛이 있다. 가장 보편적인 맛이지만 쓴 맛이 나지 않도록 노력했다. 쓰지 않고 맛있는 커피. 그게 목표였다. 사실 초콜릿 같은 뉘앙스를 더 강하게 내고 싶었으나 그럼 단가가 너무 비싸져서 포기했다. 단가를 계산하면서 O 블렌드는 200g에 9,600원이라는 숫자가 나왔다.


우선 그렇게 팔아보기로 했다. 다음은 살짝 산미가 있는 블렌드를 만들어볼 계획이다. 제품 개발하며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지만 아르바이트비로 충당하고 있다. 오전에는 로스터, 오후에는 아르바이트생, 저녁에는 사장님. 하루에 세 번씩 달라진다. 아침에 커피를 볶고 마시고, 오후에는 알바를 하다가 저녁에는 계산기를 두드리고 글을 쓴다. 마케팅을 어떻게 할지, 비용을 어떻게 줄일지, 고민거리가 쏟아진다. 커피 주문이 들어오지 않아도 출근해야 할 이유가 산더미다.


창업을 하면서 '창업하지 마'라는 사람들의 말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우습게도 나는 망할 각오까지 하고 시작했다. '노인과 바다'에서 사투 끝에 노인은 청새치를 잡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상어에게 물어뜯기면서 도착한 해안가엔 앙상한 뼈만 남아있었다. 그래서 내 브랜드가 '블랙 말린'이다. 뼈만 남더라도 나에겐 잡아보고 싶은 물고기라서 말이다.


http://naver.me/5vMhTZ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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