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굴뚝을 기다리며
2016년의 8월에 읽었던 작품 '고도를 기다리며'를 책으로 읽었다. 그 당시에는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무의미한 말장난의 연속과 있어 보이는 글귀 속에서 의미를 찾지 못했다. 연극이 아니라 글로써 접해서 그럴까. 아니면 나에게는 기다리고 있는 '고도'가 없어서 그랬을까. 그래서 '굴뚝을 기다리며' 연극을 보러 갔을 때, 살짝 걱정했다. 내가 과연 난해한 이 작품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어서.
'굴뚝을 기다리며'는 '노동자의 고공농성 투쟁'이라는 사실관과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녹여내서 만든 작품이다. 70m 위의 굴뚝에서 '누누'와 '나나'라는 이들은 굴뚝을 기다린다. 그러면서 청소부와 로봇, 그리고 소녀를 만난다. 연극의 도입부는 역시 내가 읽었던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작품과 비슷했다. 메시지가 은근히 녹아있는 말장난과 함께 유쾌하게 시작했다. 그러나 유쾌한 말장난과 함께 차가운 현실이 극을 지배한다. 시극이 진행될수록 누누와 나나가 기다리고 있는 굴뚝을 나도 함께 어렴풋이 그리게 된다.
연극이 끝나고 막이 내린 뒤, 각자 배우가 기다리는 '굴뚝'은 어떤 의미일까 궁금해졌다. 동시에 나에게 굴뚝이란 무엇을까를 고민했다. 원작 '고도를 기다리며'와는 다르게 '굴뚝을 기다리며'는 분명히 주제가 있다. '일'이다.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한 이유는 '일'에서 해고 됐기 때문이다. 누누와 나나가 만난 청소부는 일을 하기 위해서 굴뚝에 왔다. 로봇 또한 청소부를 대신해서 일을 하러 왔다. 소녀 역시 굴뚝이 전달만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 때문에 왔다. 그리고 누누와 나나도 말한다. 굴뚝을 기다리는 게 자신들의 '일'이라고.
그렇다면 굴뚝은 희망이 아닐까. 바로 일을 이어갈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노동자가 일을 다시 하기 위해서 굴뚝 위에서 투쟁했듯, 누누와 나나도 일을 이어간다는 희망을 계속 기다린다. 그러다 희망을 대신해서 도착한 것은 냉혹한 현실이다. 얼굴을 까맣게 칠한 채로 청소를 하는 사람은 굴뚝에서 잠시 쉬었다가 다시 떠난다. 더 있어달라는 누누와 나나를 뿌리치고서. 로봇은 그들이 애지중지 기르는 화초를 위협하고 소녀는 매정하게 '굴뚝은 내일 온다'라는 메시지만 남기고 떠나간다.
그러나 온다던 굴뚝은 오지 않는다. 희망은 원래 이뤄지는 존재가 아니라 늘 바라는 것으로 남기 때문이다. 꿈은 이뤄지지만 희망은 희망할 뿐 늘 그 자리에 있다. 저 멀리 보이는 굴뚝이 성큼성큼 걸어서 오지 않듯이 말이다. 어쩌면 굴뚝은 없는 걸지도 모른다면서 좌절하는 '누누'에게는 굴뚝은 과연 어떤 의미일까. 굴뚝은 올 거라고 주장하는 '나나'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그들을 연기하는 배우들에겐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의 굴뚝이 무척이나 궁금한 연극, '굴뚝을 기다리며'였다.
글을 쓰면서 에티오피아 넨세보 웨스트 알시를 추출했습니다. 카페인이 들어가야 머리가 돌아가는 기분입니다. 라즈베리 같은 달콤한 향과 깔끔한 티 같은 맛이 마음에 드네요. 무산소 가공이지만 특유의 향이 없어서 부담이 덜한 커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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