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쓰는 일기

단편 소설

by 글도둑

이번에도 서류에서 떨어졌다. 학점이 문제일까, 아니면 영어 성적? 그것도 아니면 자기소개서를 다시 써봐야 할까. 한숨을 쉬고 컴퓨터를 껐다. 그래도 오늘은 친구들을 만나는 날이다. 오늘만큼은 기분 좋게 술을 한잔하고 잘 생각이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등줄기에서 땀이 흐른다. 더운 여름, 반바지에 반팔티, 슬립온을 신고 버스에 오르자 미적지근한 에어컨 바람이 얼굴을 때린다. 나는 고개를 숙여서 정수리에 바람이 가도록 했다. 그나마 이게 시원했다. 친구들은 벌써 도착했는지, 너만 오면 된다고 연락이 온다. 계속 울리는 폰에 엄지를 가져갔다. 잠금이 해제되자 친구들에게 답장을 했다.


그 사이,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했고, 나는 서둘러 내렸다. 친구들이 보내준 음식집 위치를 다시 확인하려고 횡단보도에서 폰을 꺼냈다. 손이 살짝 미끄러져 폰이 떨어졌다. 반사신경이 폰을 잡으려고 몸을 신속하게 움직였다. 구부정한 자세로 폰을 잡았다. 몸을 다시 일으키자 눈을 감고 있는 운전자가 보였다. 자동차의 헤드 라이트가 섬뜩하게 내 얼굴을 때렸다.


섬뜩한 빛이 보여 눈을 감았는데, 그 빛이 나의 눈에 비치는 색을 모조리 가져갔다. 세상이 회색빛이었다. 누군가는 뚜렷하다 못해 빛이 났고, 누군가는 흐릿하다 못해 투명했다. 나는 내가 쓰러져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비틀비틀 자리에 일어나서 습관처럼 안경을 추켜올렸다. 그래도 흐릿한 사람은 흐릿하게 보였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내 발 밑에는 아스팔트가 깔려 있었다. 색은 여전히 회색빛이었지만, 아스팔트만의 불규칙적인 둥근 알갱이들이 납작하게 깔린 모습이 아스팔트와 똑같았다. 나는 바닥을 살짝 쓰다듬었다. 까칠까칠하면서도 약간 찐득한 느낌이, 깔린 지 얼마 안 된 듯했다.


뒤를 돌아보니 회색의 벽이 있었다. 손으로 톡톡 두드려보니 콘크리트처럼 단단했다. 다시 앞을 보니 사람들이 무뚝뚝한 표정으로 앞만 보며 걷고 있었다. 누군가는 한숨 쉬면서 앉아있기도 했다. 나는 거기서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내 발밑 주변은 아스팔트였지만, 누구는 대리석, 누구는 흙, 누구는 잔디였다. 저 멀리 지평선이 보였다. 그곳까지 회색빛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끝이 없어 보였다. 나도 우선 움직이기로 했다. 가만히 있어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신발끈을 다시 고쳐 묶었다. 먼 길을 가야 할 듯싶었다.


멍하니 길을 걷다 보니 사람마다 다른 게 보였다. 누구는 너무나 선명했고, 누구는 희미해서 투명하기까지 했다. 투명한 사람의 발 밑에는 회색빛이 일렁였다. 그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말이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 사람 근처에서 떨어져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사이, 그는 회색빛에 잡아먹혀 사라졌다.


그가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내가 그 위에 서자 그곳은 아스팔트로 포장된 도로가 되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호흡이 느껴지진 않았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서 하늘을 보았다. 흐끄무레한 뭔가가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희미한 안개처럼 보이기도 했고, 장마철 구름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시 사람들이 걸어가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을 빼고는 전부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잠시 멈춰서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가 뭘 하고 있었는지,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이곳에 대한 호기심만 생겼다.


옆에 지나가는 사람들 중, 가장 선명한 사람과 가장 희미한 사람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그 둘은 다른 이들과 조금 달랐으니까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우선 선명한 사람에게 다가갔다. 그는 다가오는 나를 보고서는 웃음을 지었다. 모습이 선명해서 그런지 표정까지 다 보였다. 깔끔하게 정리된 수염과 머리카락, 그리고 운동을 많이 했는지 다부진 몸이 느껴졌다.


나는 그에게 입을 벌려서 말하려 했다. 입은 벌렸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고, 소리는 없었지만 뜻은 전달됐다.


- 실례합니다. 혹시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확실한 건 제가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습니까?


나는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애써 무시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뛰지 않는 심장과 소리 없는 발자국은 무시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왜 죽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다만, 나는 친구들을 만나러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을 뿐었다.


- 잘 모르겠어요. 그냥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을 뿐이었는데....


- 음... 그렇습니까. 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전 육군 중사였고, 수류탄을 떨어트린 병사를 구하려다가 죽었습니다. 그래서 여기 이곳에 와있습니다. 그래도 그 병사는 근처에 없는 걸 보니 제가 구하긴 했나 봅니다. 하하...


- 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음... 그래, 여기가 어떤 곳일까요?


- 죽은 자들이 오는 곳입니다. 저는 무교입니다만, 지옥이나 천국으로 가는 중간 단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혹시 종교가 있으십니까?


- 아니요. 저도 무교라서요.


- 하하, 종교인이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저도 계속 걷기만 하면서 생각만 하고 있었거든요. 제가 알고 있는 게 딱 한 가지 있습니다. 제 몸이 왜 선명하게 보이는지 말입니다.


- 저도 사실 그게 신기해서 말을 걸었습니다. 왜 여기 사람들 중에서 당신이 제일 선명하게 보이는 걸까요?


- 제가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하자면, 아직 잊히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누군가를 위해 희생했고, 그 희생 덕분에 다른 사람에게 오랫동안 기억되나 봅니다. 특히, 그 병사에게 말입니다. 사실 저도 왜 그런지 궁금해서 이리저리 물어봤습니다. 저처럼 빛나는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처음에는 저처럼 빛나던 그들도 많이 걸어오면 걸어올수록 빛이 사라졌습니다. 나중에는 자신이 누군지도 기억 못 하고, 이렇게 대화도 못하게 되더니 결국 사라집니다. 투명해지다가 발밑에서 튀어나온 빛에게 빨려 들어가듯 말입니다. 그 후, 그 뒤로 다른 선명한 사람들과 말해봤는데, 다들 자신이 죽은 지 얼마 안 되었더군요. 아니면 사회에서 존경받던 인물이거나,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 사람들인 경우도 있었어요. 아직 잊히지 않은 사람들이었죠.


잊히지 않는 사람이 이곳에 오래 머물게 된다는 사실에 놀랐다. 친구들과 부모님들이 나를 기억하는 건가.


- 좋은 정보네요. 감사합니다. 큰 도움이 됐어요. 근데, 잊히면 어떻게 되는 걸까요? 다시 태어나는 걸까요, 아니면 그냥 사라지는 걸까요?


-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무(無)로 돌아가는 건지, 다시 환생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저는 슬슬 저는 가봐야겠습니다. 스스로를 잊기 전에 이 길의 끝을 보고 싶습니다. 부디 잊히지 않기를 빕니다.


나는 그에게 꾸벅 인사를 했고, 그는 장난스레 손을 들어 경례를 했다. 그러더니 빠른 걸음으로 나를 스쳐 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그의 신발은 가죽으로 된 전투화 같아 보였다. 기억되는 사람과 잊히는 사람이라, 재밌는 일이다. 빛난다고 해서 늦게 잊히는 건 아닐 거다. 그건 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 걸 두고 왔는지에 따라서 다를 것이다. 내가 두고 간 물건이나 작품들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면 그 또한 나를 기억하게 만들 수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 빛난다고 해서 언제까지나 빛나는 별은 없으니까.


나는 꽤 선명한 편이다. 아마 죽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부모님이 계시니까 꾸준히 나를 기억해줄 사람도 있다. 아, 엄마와 아빠가 생각난다. 아직 제대로 된 효도도 못 해 드렸는데. 신가 하게도 슬프지도, 눈물도 없다. 내 머리에 가득 찬 건, 이 세계에 대한 호기심뿐이었다.


호기심이 들었다. 희미한 사람에게 다가가려다 사라지는 걸 또 봤다. 나는 내 몸을 뒤적거렸다.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과 수첩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볼펜이 내 외투에 들어있었다. 일정을 작은 수첩에 적던 습관 때문일까, 그 수첩은 죽어서도 내 품에 있었다. 수첩 앞에 있던 몇 장을 뜯어버렸다. 그리고 첫 페이지에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를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풀기 위해서 쓰기 시작했다.


[1일 차]

1. 죽어서 도착한 곳은 회색빛 세상이다.

2. 이승 사람들에게 잊히면, 이곳에서도 사라지게 된다.

3. 그렇게 사라진 사람들은 아직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4. 사람들이 기억해줄수록 이곳에서 더 선명하게 보이고, 잊힐수록 자신을 잊게 된다.

5. 끝없는 길이 있고, 다들 걷고 있다.


생전 안 쓰던 일기를 죽어서야 쓰게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