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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선 Oct 08. 2024

음대 나온 엄마를 어따 쓰니


동네 아이 친구 엄마들과 몇 번 마주치다 보면 인사하게 되고, 몇 번 인사하다 보면 커피라도 마시러 가게 된다. 커피 몇 잔 마시다 보면 아이들에 관한 이야기 말고 엄마들 개개인에 대한 얘기도 하게 된다. 학벌까지 물어보는 일은 없지만 결혼 전에 어떤 일을 했었냐는 질문부터 훅 들어온다.


다들 대단한 직업들을 가지고 있다. 간호사, 통역사, 교사부터 온갖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분들까지. 지금 일을 하고 있는 엄마도 있고 쉬고 있는 엄마도 있다. 언제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는 분들을 만나면 무척이나 부러워진다.


차례는 나에게도 돌아온다. 바이올린을 전공해서 아이들을 가르치다 말았다고 하면 모두들 '오~'하고 신기하게 쳐다본다. 바이올린이라는 악기가 어렸을 적 동네 학원에서 한 번쯤 접해보는 악기라 다들 신이 난다. 자신이 어렸을 때 어떤 악기를 배웠었는지, 배우고 싶었던 악기는 무엇이었는지 서로 신나게 주고받다가 질문은 다시 나에게로 온다.


"왜 지금은 레슨 안 하세요?"


왜냐고? 이유야 몇 시간 동안도 말할 수 있다. 아기를 키우며 바이올린을 꺼낼 수가 없어서 손은 다 굳어버렸고, 가르치는 방법 또한 다 잊었다. 레슨을 하려면 학생들 학교와 학원이 끝난 시간에 내가 맞춰야 하는데 그 시간이면 내 아이들도 집에 오는 시간이다. 남편의 퇴근시간은 많이 늦어 육아를 분담하기가 어렵다. 또 음악계는 인맥으로 서로 소개해주고 소개받으며 일거리를 이어가는데 나는 결혼 후 타지생활을 오래 해 인맥도 다 끊겼다. 혼자 레슨시장을 개척해 나가기엔 내 학벌이 너무 단출하다. 요즘 레슨시장엔 유학파가 차고 넘친다.

내 경력단절을 안타까워하는 엄마들에게 이런 하소연을 대뜸 할 수는 없으니 "그냥 이제 안 해요."라고 간단하게 얼버무려버린다.


종종 바이올린을 꺼내보기도 하지만 이젠 정말 취미로 전락해 버렸다. 고작 몇 마디를 겨우 생각해 내 연습해 보다 화가 나버려 케이스 안에 다시 꽁꽁 넣어버리곤 한다. 자괴감이 들게 하는 바이올린은 넣어 두고 피아노 뚜껑을 열어 낡은 소나티네를 편다. 대학 다닐 때 필수교양으로 피아노를 배웠는데 그때 생각이 나서 두 손을 피아노 위에 올려놓을 때마다 즐겁다.


얼마 전 시부모님이 집에 오셨는데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싶다고 해서 잠깐 도레미파솔만 알려주었다. 아이는 몇 번 치다가 흥미를 잃고 시부모님이 계신 방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럼 내 차례! 아이 대신 내가 소나티네를 신나게 치고 있으니 방에서 어머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은아, 엄마가 음악 틀어놨나 봐."

"아닌데? 엄마가 치는 건데?"



어머님은 못 믿겠다는 듯이 몇 번을 손녀에게 되물으시곤 거실로 나오셨다. 바이올린소리 한번 안 들려주더니 피아노를 이렇게 잘 쳤냐며 놀라셨다.(정말 잘 못 친다. 그리고 바이올린 연주 들려달라고 한 번도 안 하셨으니까요?)

그날부터 나는 우리 집 피아노선생님이 되었다. 아이에게 '떴다 떴다 비행기'를 알려주고 왼손의 위치도 알려주었다.



피아노를 치는 아이 옆에 서있다 보면 옛날에 나에게 바이올린을 배우던 아이들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연습을 열심히 해와 실력이 늘던 아이들, 교내 대회에서 상 받아오던 아이들, 나를 보고 선생님이라 부르며 살갑게 다가오던 아이들까지.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연주도 하며 부모님의 자랑스러운 딸이었는데, 나의 딸에게도 자랑스러워지고 싶어 조금 열심히 가르쳐 본다. 왼손, 오른손, 도레도레 미 파 솔.



"아니, 엄마가 옆에 있으니까 더 안 되는 거잖아! 난 왼손은 잘 못 친다니까. 잘하고 싶은데 잘 안된다고!"



하.. 너 피아노학원 가서 배울래?



쓸데없이 음대를 나온 엄마는 입을 다물어야겠다.





2023. 봄에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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