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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살면서 본 가장 잘생긴 경비에게 고백받은 썰-2

머릿속에서 달달한 노래가 자동재생되던 그 순간

by 반쯤 사이공니즈
오늘은 내가 데려다줘도 될까?

6개월 동안, 말 몇 마디 해보지도 않았던 '탄'이 꺼낸 말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웠다. 바삐 퇴근준비하던 모두가 우리 둘을 쳐다보았다. 그날은 끝나고 친구네 집에서 모이기로 한 약속이 있어서, 같은 방향으로 가는 직원언니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두었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무언가 결심한 듯 비장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에 나는 이상함을 느꼈다. 내가 한사코 거절했는데도 불구하고, '탄'은 꼭 데려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데려다 주기로 한 언니는 그 모습에 "무슨 수작이냐, 뭘 하려고 그러냐" 대신 따저 물었지만, 그는 그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당시 자칭 매니저라는 책임감으로 일에 몰입해 있던 터라, 나에게 꼭 이야기하고 싶은 문제나 불만이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래, 내가 말을 친근히 걸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을 수도 있고, 무언가 사장님께 하고 싶은 말이 있을 수 있겠다. 그의 비장함에 모두가 의아해하던 차에 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마트가 마감하면 밤 11시로

꽤나 늦은 시간이었다.


당시 주변의 모든 가게들은 문을 닫았고, 주황빛 가로등만이 차 한 대 없는 도로를 비추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 떠나고, 나를 태운 '탄'은 정말 기어가는 게 빠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느린 속도로 오토바이를 몰았다. 그러더니 마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편의점에서 잠시 이야기를 해도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매일 보면서 같이 일했지만, 개인적인 유대관계는 전혀 없던지라 솔직히 무섭기도 했다.


경계와 두려움을 잔뜩 머금은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편의점으로 들어가니 '탄'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뭘 먹고 싶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계속 우겼다가는 집에 못 갈 것 같아서 대충 붕어싸만코를 골랐다. 그러고는 그는 계산대 옆 막대사탕도 한 움큼 집어 같이 계산했다. "너 사탕 좋아하잖아."라며 나에게 그 사탕들을 쥐어줬다. 내가 막대사탕에 꽂혀서 한동안 계속 입에 물고 있었던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이상하게 흘러가는 분위기에 긴장이 되었다.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마주 앉아 어색하게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사실 저 때 난 '탄'이 나보다 1살이 많다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차분하게 말했다.

나 너를 좋아해. 진짜야.

땡! 머리가 울렸다. 두려움으로 쿵쾅거리며 뛰던 심장소리가 커브를 틀며 콩닥콩닥으로 소리를 바꾸어 냈다. 당시 '한 여름밤의 꿈'이라는 달달한 노래를 즐겨 들었는데, 그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누가 배경음악을 깔아주듯 노래가 재생되었다. 내가 당황해서 몇 번이고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니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갔다.


그냥 꼭 이야기해주고 싶었어.
대답을 해줄 필요는 없어.
그냥 너에게 말해주고 싶었어.

아, 말들이 하나같이 군더더기 없이 담백했고, 간단명료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말해줘서 고맙다는 둥 이상한 말을 했던 것 같다. 어떻게 좋아하는 상대의 눈을 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볼 수 있는 거지? 오히려 고백을 받는 입장인 내가 더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너무 어렸던 나는 그저 그 상황을 벗어나고 싶었다. 설레는 마음이 불편함과 혼동되었다.

그렇게 짧지만 강력한 충격을 준 대화가 끝나고, '탄'은 걱정하지 말라며 나를 친구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길을 달리는데 역시나 시속 20키로는 밟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천천히 운전했다. 쌀쌀한 밤바람을 맞으며 서로 사소한 대화를 이어가며 10분이면 올 거리를 20분을 걸려 도착했다. 고맙다고 말하고 나는 허겁지겁 친구집으로 들어갔다.


내가 전화도 안 받고 늦게 오자 걱정한 친구들은 난리가 나있었고, 나는 한참 동안 혼이 빠져나간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시뻘건 얼굴로 무슨 일이 나에게 일어난 건지 이야기를 했다. 조금 진정되고 나니 내일이 걱정되었다.

"내일 '탄'을 어떻게 보지?" 아, 어색해서 죽어버릴 거 같다. 내일 쉰다고 해야 하나 고민을 하다가 무거운 발걸음으로 출근을 했다.

어? 근데 '탄'이 보이지 않았다.

직원언니들에게 물어보니 어제가 '탄'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왕고 매니저 언니를 제외하고 모두가 몰랐었다. 그의 선택이 아닌 그의 회사로 하여금 다른 근무지를 배정받았던 것이다. 애먼 내 걱정거리들은 갈 곳을 잃었다. 허탈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편함을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정말로 나는 대답을 할 필요가 없었고, 말없이 떠난 그 행동이 서운하기도 했다.


그 이후에도, 간간히 페이스북 메신저로 대화를 했지만 따로 만난다거나 관계가 발전되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지금 추억으로 남아있을 수 있는 거 아닐까 싶다. 같이 일 할 때 더 사람대 사람으로 친해졌으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내가 살면서 또 그런 용기 있고 배려 넘치는 고백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평생 설레는 기억을 하나 소장한 걸로 충분하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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