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기서 이방인이라는 것을 망각한 사람들
이번 이야기는 솔직하게 풀기 위해서는 당연한 이야기로 시작을 해야 한다.
당연하게도 어느 곳이던 서비스직에서는 국적, 성별, 나이를 불문하고 진상을 부리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베트남에서 시작했던 나의 첫 알바, 한국마트에서는 좋은 손님들을 더 많이 만났지만, 간간히 등장했던 빌런들이 남긴 상처는 생각보다 길고 오래갔다. 오늘은 그 '빌런'들에 관해서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초보 오토바이 운전자였던 나는 길가의 쓰레기 수레를 보지 못하고 부딪혀 넘어지는 바람에 오른쪽 발 안쪽 복숭아뼈 근처에 심한 찰과상과 타박상으로 붕대를 감고 거의 한 달을 제대로 걸어 다니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 다행히도 알바의 짬밥이 거의 알차게 차올라가던 쯤이라, 다친 상태에서도 안쪽에 앉아서 전화만 받으며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손님이 뜸해져 가는 늦은 저녁시간에 한 한국 아저씨 손님이 들어오셨다. 몇 가지를 집어서 카운터에 내려두시곤 카운터 뒤편에 앉아있던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처음처럼 어딨어?" 나는 손님의 바로 몇 걸음 뒤편의 냉장고를 가리키며 저기 있다고 알려드렸다. 뒤돌아서 그 냉장고를 본 손님은 다시 천천히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1병." 내가 "네?"라고 되물으니 "가져오라고"라고 말했다.
나름 많은 진상을 봐왔지만 정말 어이가 없었다. 화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 아픈 다리를 끌고 절뚝이며 소주 한 병을 가져다주었다. 나랑 기싸움을 하듯이 나를 노려보던 그 손님은 내 다리를 보고는 그제야 "아이고... 그런 줄 모르고 미안합니다." 라고 사과했다. 그럼 다리가 멀쩡했으면 그래도 되는 걸까?
8~9살 정도 된 듯한 한국 여자아이와 어머니가 장을 보러 왔다. 어머니가 위층으로 물건을 더 가지러 간 사이에 아이가 자신의 엄마가 카운터에 쌓아둔 물건 중 계란을 손을 뻗어서 자기 쪽으로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아이가 계란을 떨어트렸다. 주변에 있던 직원이 급하게 주었지만 계란은 이미 몇 개가 깨진 뒤였다. 그 장면을 나 포함 4명 정도의 직원이 보았다.
곧이어 내려온 엄마가 "계란이 왜 깨졌어?!" 라면서 화를 내자 아이는 직원들을 바라보며 엄마 뒤로 숨었다. 순간 그 어머니는 직원들을 째려보면서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아이가 떨어트려서 깨졌다고 설명을 드렸고, 그 손님은 화를 눌러 참는듯 우리를 째려봤다. 그러고는 계란 다시 안 가져오고 뭐 하냐고 화를 냈다. 그렇게 새 계란을 가져다 드렸고, 당연히 아이가 떨어트린 계란도 같이 계산하고 봉투에 따로 담아드렸다. 사장님이 안 계시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랬더니 "참나, 이걸 계산을 하네?? 하!!" 라고 혼잣말로 내뱉고, 우리를 노려보며 봉투를 낚아채 가게를 나갔다.
내가 아는 상식선에서는 아이는 실수를 할 수 있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는 건 부모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설마 직원들이 떨어트리고는 그 어린아이가 그랬다고 뒤집어 씌웠겠는가? 깨진 계란의 값까지 지불하는 건 그쪽에서 마땅히 책임져야 하는 대처고, 만약 사장의 재량으로 깨진 계란 값을 받지 않는다면 감사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하듯, 맡겨둔 듯 바라야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감시간이 되면 전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마감준비를 마친다. 냉장고와 에어컨을 끄고 정산을 마치고 포스 기를 끈다. 그때 모르고 들어오는 손님들은 냉장고까지 꺼져있는 걸 본다면 다음에 온다며 대부분 돌아가신다. 혹은 정말 급할 때는 양해를 구하고 물건을 구매한다.
그날은 정말 가게의 불을 끄기 직전, 한 아저씨 손님이 들어오셨다. 다른 직원들은 불평을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손님까지 계산을 해드려야 할 것 같아 모두가 기다렸다. 꺼졌던 포스기까지 전원을 다시 올렸다.
하지만 가림막까지 내려져 있었던 음료수 냉장고 앞에서 10분 이상을 계속해서 서성이고 있는 손님을 기다리다가 지친 직원들이 나를 재촉했다. 나는 총대를 메고 손님에게 조심스럽고 정중하게 말했다. "저 죄송합니다. 저희가 마감을 다 마쳐서... 조금 빨리..." 라며 기분 나쁘지 않을 말을 찾아 고민하는 나를 보며 손님은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뭐라는 거야?! 그래서 나보고 지금 나가라는 거 아니야!!!!"
그게 아니라고 물건을 사실 거면 조금 서둘러 주셨으면 좋겠다 설명하려고 했지만 이미 눈이 돌아버린 그 손님은 "지금 물건도 사지 말고 나가라는 거 아니야!!!!"라고 소리를 지르며 욕을 내뱉고는 나가버렸다.
이게 다른 순간들 중 가장 오래 기억에 남아있다. 그 순간 느꼈던 두려움과 모욕감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그날 집에 와서 정말 많이 울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자책하기도 했고, 오물을 뒤집어쓴 것 같다는 생각에 힘들었다.
당시엔 자책을 많이 했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당시 우리 아빠보다도 나이가 많아 보였던 그 아저씨 손님은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고 욕을 내뱉었을까, 그 정도로 잘못했던 걸까 궁금해진다.
나는 어릴 때부터 베트남 호치민에 있는 한인성당에 부모님과 같이 다녔다. 당연히 손님들 중에서는 성당에서 자주 보이던 낯익은 어른들도 자주 보였다. 성당에서의 밝고 친절한 모습과는 다르게 마트에서 손님으로 마주한 몇몇 어른들은 다른 사람처럼 이질적이었다. 베트남 직원들을 하대하고 간혹 소리를 지르며, 인상을 구겼다.
집 앞 마트에서 마주치는 익숙한 내 얼굴을 성당에서 알아차렸을 때, 당황하던 몇몇 사람들의 표정을 나는 기억한다. 물론 위 경우는 아주 극소수이고, 대부분의 어른들은 나를 성당에서 알아보면 반가워하고 신기해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여러 면이 존재하는 건 당연하니 그럴 수 있다 생각한다. 하지만 타국에서 현지인들에게 함부로 하는 태도는 참 실망스럽다.
정말 많은 한국손님들이 베트남어를 그럴싸하게(?)하는 나를 베트남사람으로 생각하고 함부로 대한 적도 굉장히 많았다. 나를 베트남사람이라고 착각하는 건 문제가 없지만, 베트남 사람과 한국사람에게 대하는 태도가 다른 건 분명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직원들에게 대뜸 한국어로 물어보고는 못 알아듣는다고 화를 내거나, 반말로 무언가를 시키거나, 앞에서 욕지거리를 중얼거린다. 베트남이라는 타국에서 신세 지는 입장의 외국인으로서 부끄러움도 염치도 없이 뭐라도 된 듯 행동하는 한국인들을 보고 있으면 낯 부끄럽고, 베트남 사람들에게 미안해질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