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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반 Aug 14. 2020

영화 <델마와 루이스>, 연대와 해방의 선전 포고


<델마와 루이스>는 두 주인공의 여정을 담은 버디무비이자 로드무비다. 여느 버디무비처럼 두 주인공이 서로의 차이점을 극복해나가고, 로드무비 답게 여정의 끝에서 자아를 발견하고 정체성을 확립한다. 하지만 두 주인공이 여성이기 때문에 페미니즘 영화가 된다. 무수히 존재하는 기존 영화에서 주인공의 성별만 바꿨을 뿐인데 페미니즘 영화가 된다. 물론 가부장제 남성 권력에 빼앗긴 여성의 권리를 되찾는 것, 그게 바로 페미니즘이다.


누가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몰았을까? 영화가 개봉한 지 30년이 지났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누가 죄인인가

델마와 루이스는 델마의 남편으로 상징되는 가부장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작은 일탈을 시도하지만, 남자들에 의해 점점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슬로컴브 형사의 말처럼, 매 순간 그들의 마지막 희망을 앗아간 건 모두 남자였다. 술집에서 만난 남자 때문에 살인을 하고, 돈을 훔쳐 간 제이디 때문에 강도가 된다. 그런 와중에 눈치 없이 순진한 델마는 답답하고, 쓸데없이 예민한 루이스는 불편하다. 당연히 모든 문제는 델마가 아닌 남자들의 잘못이었고, 루이스는 그런 일을 미리 방지하려 했을 뿐이다. 하지만 세상은 남자와 춤을 춘 델마의 잘못이라고 말한다. 사건의 원인은 무시한 채 피해자인 여성을 가해자로 만든 것이다.



심지어 영화를 보는 우리조차도 가끔은 델마가 답답하고 루이스가 불편하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피해자를 재고 따지도록 학습 받았기 때문이다. 델마는 '순백의 피해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정당한 보호를 받지 못한다. 사회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델마와 루이스가 한 선택은 정당방위다. 물론 모두 그들의 선택이었지만, 남자들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면 그들 역시 하지 않았을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럼에도 델마와 루이스는 매 순간 자신들을 위한 최선의 선택을 한다.

 



연대와 해방의 선전포고

아이러니하게도 돌이킬 수 없는 여행은 그들이 바라던 초반의 일탈과 맥락을 같이한다. 여행이 깊어질 수록 델마와 루이스는 정체성을 찾아간다. 델마는 보수적인 남편에게서 벗어나고, 루이스는 과거의 상처를 씻어낸다. 사회에서 여성에게 부여한 역할을 탈피하고 주체성을 되찾은 것이다. 성희롱을 일삼던 남자의 트럭을 폭파하는 장면은 영화의 하이라이트이자 가부장제와 남성을 향한 선전 포고다.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델마와 루이스는 서로 연대함으로써 해방된다. 절체절명의 순간 델마를 구한 건 루이스였고, 전 재산을 잃고 망연자실한 루이스를 일으킨 건 델마였다. 더 많은 델마와 루이스가 연대의 힘을 보여줬다면 그들의 끝은 달랐을까? 시간을 넘나드는 무전기로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여전히 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더 많은 델마와 루이스가 서로를 위해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 달라졌노라, 대답하고 싶다.

 



자유를 향해서

<에이리언>과 <블레이드 러너>로 유명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작품이다. 그래서 중간중간 분위기나 OST가 <블레이드 러너>를 떠오르게 한다. 델마와 루이스의 뒤를 쫓는 경찰의 모습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레플리칸트를 폐기하기 위해 그들을 쫓는 블레이드 러너를 떠오르게 한다. 똑같은 외모지만 복제인간이라는 이유로 대우받지 못하는 레플리칸트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차별 받았던 델마와 루이스를 닮았다. 특히, 레플리칸트 '로이 베티'의 마지막은 보는 이는 가슴 아프지만 정작 당사자는 가장 자유로워 보인다는 점에서 델마와 루이스의 마지막과 겹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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