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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반 Aug 14. 2020

영화 <레토>, 청춘을 노래하다.


영화 <레토>는 러시아 록 음악을 대표하는 밴드 '키노'의 리더 '빅토르 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전기 영화라기보다는 음악 영화, 음악 영화라기보다는 청춘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빅토르 최를 알게 된 사람도 많겠지만, 빅토르 최의 전기 영화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 있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상 마이크고, 영화는 빅토르 최의 음악이 아니라 그 시절 러시아의 청춘을 다루고 있다.




숨겨진 진짜 주인공

마이크는 영화 <싱 스트리트>의 주인공 '코너'의 형 '브렌든'을 떠오르게 한다. '넌 내가 닦아놓은 편한 길을 왔을 뿐이야'라고 일침했지만, 결국 코너를 음악적으로 성장시킨 사람은 브렌든이었다. 마이크 역시 빅토르의 재능을 알아보고 물심양면, 말 그대로 몸과 마음을 바쳐 그를 성장시킨다. 빅토르에게 음악적 영감을 불러올 미국(당시 그들의 적국이었던)과 영국의 록밴드를 소개하고, 음악의 완성도를 위해 조언하고, 세상이 빅토르를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 '나타샤'가 빅토르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고도 묵인한다. 마이크가 빅토르를 얼마나 아끼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빅토르와 나타샤를 위해 집을 떠난 밤, 빗속에서 갈 곳 없이 떠도는 마이크의 모습과 함께 'Perfect Day'가 흘러나오는 시퀀스는 개인적으로 꼽는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공원에 앉아 술을 마시고, 동물원에서 동물들 먹이를 주고, 영화를 보고, 집에 돌아가는 것'이 완벽한 날이라지만, 돌아갈 집이 없는 마이크에게는 'such a imperfect day(전혀 완벽하지 않은 날)'다. 마이크의 모든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현실과 타협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 반복되는 현실의 공허함, 빅토르를 향한 질투, 나타샤로 인한 슬픔. 그러나 슬픔과 절망 속에서 마이크는 희망을 발견한다. 빅토르라면 현실에 순응한 자신과 다를 것이라는 희망. 도약을 준비하는 빅토르의 옆에서 마이크는 조력자를 자처한다.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영화는 몇몇 장면을 제외하면 모두 흑백이지만 전혀 낯설지 않다. 오히려 청춘의 자유를 억압한 당시의 시대 상황과 어우러진다. 1980년대 초, 록 뮤지션과 언더그라운드 예술가를 칭할 때 '뚜소브까'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뚜소브까란 가치나 취향을 공유하는 소규모 공동체라는 뜻으로 1980년대 소련의 신조어였다. 영화는 마이크와 빅토르를 비롯해, 시대와 가치를 공유했던 당시 뚜소브까들의 일상을 그리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저항보다는 현실의 빈틈과 사각지대에 자신의 삶을 쌓아나가는 쪽에 가깝다. 그래서 러시아의 어느 평론가는 <레토>의 주인공들이 '억압에 저항하는 대신 억압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아간다'고 하기도 했다.   



기본적으로 흑백이지만, 중간중간 뮤직비디오와 뮤지컬 같은 장면에서 컬러가 등장하기도 한다. 주인공 사이의 관계와 감정에 집중할 수 있도록 롱테이크가 자주 등장하는데, 컬러 장면과 함께 영화의 몰입도를 높인다. 뮤지컬 같은 장면들 중, 노래 'Passenger'와 함께 나타샤와 빅토르의 관계 진전을 보여주는 시퀀스도 명장면 중 하나다. 하지만 영화에 몰입하기 무섭게 해설자를 자처하는 제3의 인물이 등장해 '이건 없었던 일'이라며 선을 긋는다. 영화의 스크린을 뚫고 나와 관객을 낯설게 만든다. 이건 영화일 뿐이며, 당시 러시아의 현실은 영화처럼 아름답지 않았다고 상기시켜준다.




영화보다 더한 현실

그 시절 청춘을 추억하는 영화이면서도 작금의 현실을 풍자하는 영화기도 하다. 실제로 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는 그가 운영하는 극단 고골 센터의 공금을 횡령했다는 이유로 촬영 도중 경찰에 연행되었다. <레토>는 그의 작품 중 처음으로 칸영화제 공식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지만, 정작 감독 당사자는 가택 구금으로 그 영광을 현장에서 누리지 못했다. 감독의 전작과 차기작이 러시아 정부의 심기를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의견이 우세하다. 또한, 영화의 등장인물 대부분은 빅토르 최를 연기한 배우 유태오를 제외하면 모두 고골 센터 출신 배우들이다. 다양한 전위적 예술 활동을 보여온 고골 센터의 감독, 배우들과 그들을 억압하는 정부의 모습은 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 'Leto'는 러시아어로 여름을 뜻한다. 청춘을 대변하는 계절이지만, 흑백이기 때문에 여름의 청량한 하늘빛이나 싱그러운 초록빛은 볼 수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청춘으로 가득하다. 음악을 향한 열정과, 청춘을 상징하는 록 음악이 영화 곳곳에 포진해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사진작가의 카메라 릴 영상에서 간간히 등장하는 색깔들은 답답한 현실에서도 젊음을 향유했을 청춘의 모습을 담고있다. 그래서 빅토르 최와 마이크의 사망 년도로 끝나는 이 영화는, 그 시절을 살아낸 청춘에게 헌정하는 존경과 공감의 찬사이다.



* 당시 러시아의 상황과 영화 관련 정보를 다음 포스팅에서 많이 참조했다. 읽고 나면 영화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https://daskraftwerk.tistory.com/172 [Das Kraftwe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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