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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감 환자 셋이 내 옆에서 자고 있다.

나만 멀쩡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왜 나만 멀쩡해?

진정 그것이 궁금했다. 며칠째 칼칼한 목상태와 약간의 미열. 그게 다였다.


막둥이, 첫째, 큰아들(남편) 순으로 독감 확진. 나는 아직이다. 평소 골골대던 순이라면 내가 1순위라 생각했는데, 아직 오지 않은 건지 정말 피해 가는 건지.

예로부터 말이 씨가 된다고 했고, 꼭- 난 잘 안 아프다는 식의 말을 내뱉고 나면 다음날 아프기 시작하던데. 그게 진짜인지는 내일이 되어 보면 답이 나올 것이다. (와 이러니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해진다)


뭐, 크게 상관은 없다. 어차피 독감 소굴에 있으니 걸려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다만 아이들부터 번갈아 하루 걸러 병원에 가고, 또 가서 독감 검사를 하고, 확진이 되고. 하루 세 번 약 대령에 타미플루 12시간 간격 맞춰 하루 두 번 먹이고. 돌아서면 열이 치솟고 해열제 추가 복용 챙기다 보면 하루가 다 가는데. 이제 조금 열이 잡히고 살만하다 싶을 때쯤 일찌감치 퇴근해 들어오는 신랑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벌겋게 충혈된 눈과 핑크빛 두 볼. 애들도 아픈데 낮 술을 하고 왔을 린 없고, 역시나 옮은 거다. 덩치는 산만한 사람이 이런 건 또 기가 막히게 잘 걸려주신다.



코로나는 음성, 독감은 양성



남편을 데리고 또 병원에 간다. 집에 오는 길에 병원에 들렀다는데 열 있다는 말도 못 하고 체온 측정도 안 하고 그냥 감기약만 타왔다. 에먼 코로나 검사만 하고 음성 확인서도 받아왔다. 아휴, 집에 독감환자가 둘이나 있는데 몸살이 심하면 당연히 상황설명을 했어야지. 그럼 독감 검사 해줬을 거 아냐, 살짝 채근하고 병원에 전화해 다시 가겠다고 예약부터 걸어둔다.

예약은 안 받는 곳이지만 대기자가 꽤 많기에. 조금 전 한참을 기다려 진료 받은 이런 사람을 그냥 보낸 게 미안한지 특별히 먼저 검사를 해준다. 여지없이 두 줄이 나온다.


남편 먼저 들여보내고 우리가 좋아하는 순댓국을 포장한다. 이런 날은 뜨끈한 국물이지. 나도 나름 바쁜 워킹맘이니 요리할 시간은 없었다. 퇴근 후 애들 병원에 신랑 병원에 왔다 갔다,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나 오늘. 어쨌든 나라도 안 아프니 다행이다. 저녁을 준비할 수 있어서. 이래서 가족 중 한 명은 안 아프고 살아남나 보다. 다 누군가의 큰 그림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기분이다.


순댓국은 옳았다. 포장해오면 별로일 줄 알았지만 아니, 냄비에 팔팔 끓이니 제법 괜찮았다. 물론 식당에서 뚝배기로 먹는 게 최고지만. 이런 날 집에서 이 정도면 땡큐다.

며칠 골골대던 아이들은 열이 좀 내렸다고 이제 팔팔하게 날뛴다. 이번 한 주 아픈 김에 쉬어 간다고, 아주 신나게 놀고 있다. 학원이며 방과 후 수업이며 다 미뤄놓고 나름의 '공식' 휴가를 즐기는 것이다.






병원 소견서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인플루엔자 확진으로
1) 5일간 격리 치료 또는
2) 해열제 복용 없이 발열이 없어진 후 24시간까지 격리 치료 요합니다.


후- 격리라니.


그런데 있다 보니 이게 참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학원 스케줄에, 오전으로 당겨진 방과 후 수업에, 몇몇 특강까지. 사실 어떤 면에선 학기 중보다 더 바쁘기도 한 짧은 겨울방학인데, 갑자기 올스톱 하고 집에 틀어박혀 지지고 볶다 보니 진정 오랜만에 진짜 방학 같은 방학을 보내는 기분이다.

사실 이번주부터 하려던 문제집도 사놨고, 이미 월요일에 스타트를 했으나. 아픈 애들 데리고 무슨 공부냔 생각에 중단한 상태다. 뭔가 매우 찝찝한 기분이지만 다 내려놓고, 한 번 오래간만에 푹- 쉬어봐라 주문하고 있는 참이다.

요즘엔 아이들 공부시키지 않아도 되는 어린 시절이 그리웠는데, 잠시 그때로 돌아간 기분이랄까?

공부를 시킨다는 게 참 아이러니하지만 아직 자기 주도가 뭔지 먹는 건가 하는 아그들에겐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라는 거, 공감하는 분들 많으실 게다.

어쨌든 좋다는 말이다.


아이 둘과 신랑까지, 싹 다 독감에 걸려 괜찮은 점은 또 있다.

일단 나는 아직 무사하니 내가 이들을 케어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게 약 배급하는 것도 은근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애들 약은 어찌나 복잡한지. 두 명 약이 미묘하게 달라서 꼭 분리해두고 이름표 확인하고 줘야 하고, 시럽 두 통을 9밀리리터와 5밀리리터로 섞고, 가루약을 털어 넣고 쉐킷쉐킷. 흔들어 준다. 약병도 작고 눈금도 자잘해서 애들 엄마는 노안 오면 못해먹겠구나 생각도 든다. 요즘 살짝 조짐이 오는데, 이렇게 정신없는 와중 노안까지 생각해야 한다니 인생은 참 복잡하다.

여하튼 이런 복잡한 약 제조에 신랑까지 합세해 "나도 약 갖다 줘"를 외치고 있으니, 설거지 고무장갑 벗기 무섭게 할 일이 쏟아진다.

타미플루도 먹여야 한다. 몸무게 따라 처방되니 작은애는 30mg짜리 2알씩 하루 두 번, 큰 애는 좀 더 큰 용량으로 1알 2번. 신랑도 마찬가지. 물 고이 떠다 한 알씩 입안에 넣고 삼키는 것까지 지켜보고 나면 약투여 임무는 끝이 난다. 다만 의사와 간호사, 약사 분들께 타미플루의 부작용을 하도 들어서 그런가. 절대 혼자 두지는 말아야 한다.




네이버에서 '타미플루'라고 치면 연관 검색어 최상단에 '타미플루 부작용'이라고 나오는데, 치고 들어가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화학백과


환상과 발작이라니. 실제 부작용으로 인한 사고들도 있었고, 이러한 이유로 절대 타미플루 복용자를 혼자 두지 말라는 약사님들의 당부까지 있어서 그런가 괜히 더 불안해지는 마음이다.

그래서 당연히 어젯밤까지는 신랑이랑 각각 한 놈 씩 맡아서 따로 방에서 잤는데, 오늘은 셋 다 타미플루 복용자다. 내가 셋을 케어해야 한다. 부작용이 무섭다니 신랑도 유난 떨지 말란 말을 못 하고, 난 안방 침대 아래 이불을 펴주고 아이들을 눕혔다. 한 방에서 자는 이유는 무거운데 분위기는 가볍다. 평소 잠자지 않는 자리에 이불 펴고 누우니 아이들은 신이 났고 나도 덩달아 들떠 버렸다.

오랜만에 우리 넷이 한 방에 옹기종기 모인 기분. 따뜻하다.






참으로 소중하다. 셋 쪼로록 눕혀놓고 나는 글 좀 쓰겠다며 약한 불 켜놓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 새벽이.

그렇지만 아이들이 커갈수록 점점 따로 자게 되겠지, 하는 생각에 못내 아쉬운 마음도 함께다.


지난여름 이사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 한 방에서 침대 두 개 붙이고 같이 잤는데. 이사 와서 너희들 방 따로 해줬더니 그때부터 같이 안 자기 시작했잖아. 몸은 편해졌는데 마음은 아쉬운 기분, 너희는 알려나? 음.. 감상적인 엄마만 느끼나 봐. 뭐 괜찮아 그래도, 같이 비비고 뒹굴고 자던 그 느낌. 내가 다 기억할게.
...
근데 그거 몰랐지, 너네도 다 기억하게 될 거야. 나도 어릴 때 자다가 새벽에 깨서 엄마 침대 속에 기어들어가 잘 때, 엄마 허벅지의 따뜻한 그 온기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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